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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고래 Jun 22. 2023

나의 노화 일지

나이드는 것에 대한 푸념 혹은 투쟁


[나의 노화 일지]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어떤 완성이 아니라 상실과 훼손과 망각으로 향하는 서글픈 과정일지도 모른다."(33p)_ 박수민, <탐독의 만화경> 중에서.


 이마에 안경을 붙이고 핸드폰을 보는 정수리가 휑한 아저씨를 보니 예전에는 우스웠는데 요즘은 서글프다. 저 사람은 언제부터 늙음을 경험했을까. 핸드폰 화면 글자를 키우고, 돋보기를 머리에 올려 쓰는 시기. 나는 그동안 둥둥이들 키우며 30대부터 몸 나이는 50이라고 앓는 소리를 했었지만, 진짜 체감한 건 올해가 되었다.


 퇴사하고 나니 남은 건 정리를 기다리는 고요한 살림들과 끙끙 앓는 몸뚱어리였다. 골반부터 무릎 발목까지 저릿저릿하여 밤잠 못 이루던 시간들. 병원은 또 왜 그리 가기가 싫은 것인지. 미루다 지난주에 아는 분이 개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병원 오는 대신 열심히 운동했다고 변명을 했지만, 혼쭐났다. 척추 4번 5번이 많이 망가졌단다. 협착으로 4번 신경이 눌렸고, 꽤 심각한단다. 한 번 놓을 주사를 여러 번 놔주는 거부하고픈 친절함의 루시퍼 아니 가브리엘 의사 선생님. 척추 신경 옆에 맞는 주사는 무섭다. 내가 안 올까 봐 언제 오냐고 엊그제는 확인 문자까지 주신다. 신경차단술 주사를 맞으니 처음엔 미동도 없었다. 많이 막혀있다나. 두 번째 맞으니 발끝까지 경련이 온다. ‘못 걷는 건 아니겠지?’ 같이 교회 다니는 사이지만 믿음이 없다. 주여.


주사 맞고 어기적 걸어 나오니 서럽다. 둥이들을 앞뒤로 안고 업고 달리며 먹고사는 일에 수고했던 나의 몸. 여섯 식구 빨래 바구니를 나르고, 식사 준비하며 종일 서있던 날들. 살림만 하다가 밥벌이를 하면서도 노동의 양적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거 참 희한하다. 여성의 노동이란 과거에 비해 모습과 종류만 달라졌지 체감하는 수고의 비용과 크기는 비슷하니 말이다. 게다가 사회복지 한답시고 타인의 인생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염증 수치 올리기 운동에 어찌나 열심히 참여했던지. 남들 20년 쓸 몸을 10년 안에 다 소진한 느낌이랄까. 여하튼 그런 우울한 생각이 꼬꼬무가 되어 골똘한 모습으로 정형외과를 나왔다. 상념에 빠질 새도 없이 안과로 향했다. “웰컴 투 병원투어 앤 노화월드!”


 시모님 가라사대, “너희도 금방이다. 노안(老眼)은 45세에 온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노안의 시련은 만 나이 42세 닭띠 여성에게 찾아왔다. 핸드폰은 왜 내 손에서 점점 멀어지는가. 눈을 아무리 비벼보아도 선명해지지 않을 때의 그 충격. 에라 모르겠다, 책도 읽지 말자. 안과 의사 선생님도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라 더없이 다정하다. 노안이 조금 빨리 찾아왔으나 다행히 백내장 등의 안과 질환은 없다며 괜찮다고 한다. ‘다들 왜 괜찮다고만 해!’ 늙으니 나도 혼잣말 대환장 파티다.


 돋보기를 맞추러 갔다. 내 울적한 표정을 캐치한 20년 베테랑 안경사는 눈살 찌푸리면 주름만 생기고 보톡스 맞게 되니 마음 편하게 가지란다. ‘오늘 다들 왜 이래.’ 나는 별 대꾸 하지 않았다. 안경사는 다초점 렌즈를 추천한다. 며칠 기다려야 하는 기능성 렌즈인가 보다. 며칠 책 읽기 싫은 핑계대기 딱 좋은 날이다. 그동안 독서도, 글쓰기도 화면이 흐릿하고 어지러워 부지런히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이 글을 썼던 며칠 전과 지금의 나는 또 감정이 다르다. 울적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안경이 예뻐 써보고 요리조리 셀카도 찍어본다. 박영선 목사님은 인간의 최고 권리는 변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편견, 고정관념, 한 두 가지 감정 사로잡히지 말고 다양하고 풍성해지라고 조언하셨다. 내친김에 억지 결론까지 내본다. 대체 노안은 무엇이냔 말이다.


노안老眼을 로안路安으로 해석한다. ‘一路平安’은 먼 길이나 여행 중의 평안함이라는 뜻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걸 억지로 선명하게 보아 일일이 따지고 살지 않으련다. 어차피 남은 생은 흐릿하게 살아야 한다. 뭐 하나 선명하게 보이거나, 분명하게 들리는 것은 점차 없을 것이다. 옳고 그름은 분별하되,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내려놓으려 한다. 지랄 맞은 성격상 딱히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아주 조금만 더 평안해지련다. 척추와 시력을 훼손하고 상실하는 서글픈 나이더라도 평안은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노화에 대한 의지요, 투쟁이요, 푸념이다. 돋보기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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