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픈 이유
먹고 싶다는 건 내 몸이 필요해서이다, 라고 굳게 믿고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내 몸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헛헛하고 자꾸 아팠다. 기침도 유난히 오래 했다. 겨우내 귀잠, 한잠도 못하였다. 며느리가 걱정된 시모님이 서울에서 비타민 주스와 경옥고를 사서 보내주셨다. 바지런히 먹고 있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와중에 들리는 몸의 소리. 엥? 겉절이 김치? 게다가 알고리즘도 내 마음을 꿰뚫듯이 겉절이 김치 영상을 추천하고 나는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년 11월 친정에서 김장을 하고 2개월이 지났고 이미 그 김치들은 모두 소멸되었다. 물론 건강하고 행복하게 소멸되었다. 마트에서 김치를 두어 포기 샀지만 어쩐지 잘 소멸되지 않고 있는 중인데, 식솔들 젓가락의 느린 속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미 할머니 김치에 길들여진 것이다. 김장 김치는 서울 가면 얻어오리라 생각하며 참고 있는데, 겉절이 김치는 참기 힘들었다. 겉절이 김치는 애벌로 절여 양념에 버무려 바로 먹는 김치를 말한다. 새콤달콤 싱싱하며 칼국수나 보쌈에도 잘 어울린다. 이것은 만들면 바로 먹어야 하는 종류의 음식이다.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끔 용기라는 걸 부리는데 하필 이때 발휘가 되었다. 배추를 사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퇴근길 남편에게 배추를 사 오라고 부탁했다. 물론 왜 사 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안 사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편은 배춧국이나 끓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배추가 집에 도착했다. 용기를 낸 것 치고는 무서워서 이틀간 베란다에 두고 지켜보기만 했다. 특정공포증이란 이런 것일지도. 게다가 남편은 엄청나게 큰 배추를 사 왔다. 원래 배추가 이렇게 컸던가. 그냥 차라리 다 떼서 산 채로 먹어버리고 질리면 국이나 끓일까. 속이 시끄러웠다.
모든 주부가 김치를 잘 만드는 건 아니다. 아이가 많다고 대부분의 반찬을 잘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끼니를 때우고 생존을 위한 목적으로 휘뚜루마뚜루 레시피 없이 대략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신혼 때 겁 없이 덤볐던 김치의 실패담은 요즘도 남편이 잘난 아내의 기를 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회자되곤 한다. 잘 절이지 못해 뻣뻣해진 배추로 양념을 하다가 결국 도저히 알 수 없는 맛이 나서 버렸다는 이야기. 신혼의 힘으로도 먹지 못했다는 그 김치.
“저러다 배추 썩겠어. 결국 국이나 끓이겠지.”라고 말하는 남편의 시망스러운 아랍 상인 같은 표정에 전투력 상승.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를 펼친 나는 겉절이 김치라는 것에 도전해 보기로 한 후 레시피 세 개를 찾아 나만의 레시피로 정리하였다. 때마침 쌀이 없어 찹쌀로 밥을 했는데 한 공기가 남았다. 쪽파와 부추도 남고 생강도 있고 액젓도 종류별로 있었다. 게다가 엄마가 직접 만든 새우젓이 있으니 대충 만들어도 맛있을 환경이었다. 나만 잘하면 된다.
깨끗하게 세 번 씻은 배추를 겉절이 모양으로 잘라 굵은소금을 켜켜이 뿌리고 따뜻한 소금물에 정성스레 배추를 절였다. 용기 탱천한 15년 차 주부 앞에 항복한 모습이었다. 배와 사과와 양파, 밥, 액젓들을 넣어 갈고 역시 엄마표 매실액과 고춧가루 등을 넣어 양념을 섞었다. (이 정도면 엄마가 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마표가 많다.)
결과는 대만족. 워낙 기대치가 없어서인지 훌륭했다는 자체 평가를 남긴다. 애들과 남편은 먹지 않는다. 어? 어 그래. 그럴 수 있지. 어차피 나를 위해 만들었으니 크게 개의치 않는다. 벌써 몸이 낫는 착각도 든다. 몸으로 소멸되고 소화되는 김치에 들어가는 수고의 크기는 대단하다, 상상 이상이다. 불현듯 눈이 시근해진다. 달지 않고 시원한 가을 동치미, 상큼한 여름 열무김치와 얼갈이, 갓김치와 깍두기, 알타리 무김치 등 수많은 엄마의 발효 음식들. 작고 여린 체구로 무거운 것을 번쩍 들던 슈퍼우먼 엄마의 수고. 그 수고가 누적되어 허리와 다리가 아파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멀리서 들었다. 김치로 엄마를 만났는데 못 만나서 내가 요즘 그리 아팠나 보다. 그리고 앞으로 엄마 김치를 자주 못 만날 수 있다는 상상이 자꾸만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