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이토록 평범한 미래>, <너무나 많은 여름이>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살림
“보아라, 결국 파국이다.” 드라마 도깨비 명대사가 생각나는 책. 1874년 파국로맨스의 조상 격. 이 책이 이토록 끔찍하고 비열하고 막장인 줄은 전에는 몰랐다. 고전은 10대가 아닌 중년에 읽어야 제맛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소설. 절망보다는 히스클리스프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가득하다.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보다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에밀리 브론테는 훗날 혐오 관계, 집착 연애, 막장 등 요즘 작품의 시초가 될 줄 알았을까. 청소년판으로 읽었지만 청소년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자 또 읽고 싶은 묘한 책. 영문판 도전?
“이제 복수할 마음이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 아량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쟤들을 파멸시키는 게 즐겁지 않다는 이야기야. 나는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할 만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야. (중략) 내 권리를 지키려는 대 온갖 노력의 화신, 추락한 내 모습의 화신, 내 자존심과 내 행복과 내 번뇌의 화신!” (284p)
“나만의 천국은 따로 있어. 남들이 가 있는 천국, 나는 거긴 관심도 없고 거긴 가고 싶지도 않아.” (288p)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문학동네
<이토록 평범한 미래> 단편집은 2022년 편집자K의 구독자가 뽑은 올해의 책 TOP10 중 한 작품이었다. 흥미로운 단편들이 모여져 있었고,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입으로 읊조릴 만큼 문장 하나하나 명확하고 깔끔하고 시적인 느낌이 있다. 특히 「세컨드 윈드」에서 밑줄을 많이 그었다. 잠시 일을 쉬며 다음을 스텝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이라 더 와 닿았나보다. 지금 나의 시간은 보이는 단조로운 일상만큼 단순하지 않다. 기쁘거나 충만하기보다 불안하고 무력해지는 시간이 더 많다. 작가의 말처럼 의미 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의미 없는 것들의 무자비함을 벗어나려면 내면의 이야기를 더 세워가야 한다. 세컨드 윈드를 즐기고 그 다음.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 윈드’라고 하더라.” (60p)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레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또한 단편집으로 앞서 말한 책을 작년에 읽고 올해 다시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다정한 작품이다. 어쩐지 <이토록 평범한 미래>보다는 다정하게 느껴졌는데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통찰이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인지도. 어쩐지 나는 그동안 여성 작가의 작품만 읽었던 습관이 남아 모든 화자를 여성으로 착각해서 몇 번이나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했다는 우스운 경험이 있는데 낯설고 새로웠다. 김연수 작가는 낭독회 시간을 많이 갖는 것 같다. 참, 낭독에 잘 어울리는 글들이다.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256p)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28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