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라는 말이 주는 무게를 실은 묵직한 책
서평, <어린이라는 세계>
‘세계’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게 된다. 13년 동안 방영했던 <동물의 세계> 정도 되는 다큐라야 세계를 붙일 수 있지 않은가. ‘세계’라는 명사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 또는 인류 사회 전체를 말하고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를 말한다. 한동안 모두가 <어린이라는 세계>에 대해 말할 때 ‘어린이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어린이라는 세계로 제목을 지었을까?’ 라며 의아해하며 굳이 책을 읽지 않았다. 과장되거나 뻔한 내용들일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오만과 편견이다. 모든 책은 때가 있는 법. 어린이의 고통과 아픔을 다루는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청년들의 외로움을 톺아보는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야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쩌면 우리들의 아픔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무의식의 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아동심리학자나 연구원도 아니다. 평범한 어린이 출판 편집자이자 독서교실 선생님이다. 어린이 출판 편집자나 독서교실 선생님이라고 모두 어린이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또 김소영 작가가 어린이를 매우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미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어린이라는 세계>의 제목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 어린이의 마음과 말과 태도를 귀담아듣고 잘 헤아리고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작가는 좀 독특했는데, (이 또한 나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느꼈다. 그녀는 예민하고 섬세하며 타인의 감정과 태도에 민감하고, 따뜻하고 깊으며 특히 작고 여린 것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타입.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돌보고 치유했던 이야기.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부모님도 이모나 삼촌도 선생님도 아닌 사람이 나를 지켜 주고 있구나. 나는 짜부라지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그 느낌이 여태껏 생생하다. (143)”
그런데 이러한 책은 서평 쓰기 참 힘들다. 쉽게 읽히는 글 안에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이슈와 내용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눈여겨보는 것들을 작가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학대나 노키즈존, 화려하게 대중을 속이는 미디어 등의 사회적 이슈들, 아이들의 똘똘하고 순수하고 해맑은 삶과 고군분투하는 삶, 작고 소외된 자를 낮은 자세로 섬기고 사랑하려는 가치관,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애증 등. 얼마나 많이 공감하고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러니까 칼국수를 먹다가, 빨래를 널다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은, 다섯 살 어린이의 삶이다. (162)”
“오징어튀김을 씹으면서 생각했다. 만일 어떤 가게에서 ‘사십 대 여성 출입 금지’, ‘경기도민 출입 금지’, ‘한국인 사절’같은 팻말을 내건다면, 나는 그곳에 찾아가서 나를 받아 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가게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실수로라도 그 앞을 지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곤두박질친다고 뉴스에서는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너무 쉬운 문제다.(213)”
교회 초등부에서 나는 작가처럼 아이들 겉옷을 받아준다. 정중하고 소중하게 대접한다. 아이들은 부족한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내 자녀들의 시간을 기다려주고 조급해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김소영 작가님은 <어린이라는 세계>를 출판하기 잘했다며 엄청나게 뿌듯해하실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어떤 전혀 새로운 일을 해볼지. 어떤 작은 것에 꽂혀 글을 쓸지 자꾸 고민한다. 글쓰기는 치유이자 괴로움인데 어쩐지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