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떠나는 여행 -7

스웨덴 스톡홀름 _2 감라 스탄과 바사호 박물관

by 박용기
감라 스탄으로 올라가는 초엽에서 바라본 스톡홀름 물길 주변의 풍경. 왼쪽 사진의 왼쪽 건물이 왕궁



시청사 구경을 마치고

감라 스탄 구시가지를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감라 스탄 (Gamla stan)은 스웨덴어로 '옛 마을'을 뜻합니다.

스톡홀름이 1252년에 세워질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지역입니다.


감라 스탄은 스타스홀멘 섬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으로는

말뫼르(Mälaren) 호수와 발트해(Baltic Sea)가 만나는 지점의

해협 및 수로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현재도 스웨덴 국왕의 공식 거처인

스톡홀름 왕궁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좁고 구불구불한 자갈길로 되어있으며,

따뜻한 색감의 중세풍 건물들이 있습니다.

특히 건물 외벽을

노랑, 주황, 붉은색 등으로 칠한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된

중세 구시가지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날도 왕궁에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왕궁앞길은 통제되고,

멀리서 스웨덴 빅토리아 공주(왕위를 이어갈 왕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중앙 광장에서 바라본 스톡홀름 대성당



감라 스탄에는 왕궁 외에도,

중앙 광장인 스토르토리에트 광장(Stortorget)과

스웨덴 국왕과 왕비의 대관식과

왕실 결혼식이 열리는 왕실 교회인 스톡홀름 대성당(Storkyrkan),

노벨상과 수상자들의 업적을 소개하는

노벨 박물관(Nobel Museum) 등이 있습니다.


중앙 광장은 오래전

비극적 사건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1520년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칼마르 연합에 속해 있었지만,

스웨덴은 독립을 원했습니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는

스톡홀름을 점령하고

국왕으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그는 스웨덴 귀족들과 지도자들을

화해시키겠다며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약 80여 명의 귀족, 성직자 및 시민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며칠간의 공개 재판 후,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에서

집단 처형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교수형과 참수형이 이어지며

광장이 피로 물들었고,

이 사건을 “스톡홀름 피바다”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던 구스타프 바사가

그 후 독립 전쟁을 일으켜

1523년 스웨덴 국왕에 오르고,

스웨덴은 칼마르 연합에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중앙 광장 주변에는

노랑, 주황, 붉은색 등으로 칠한

북유럽 특유의 건물들이 둘러 서 있고

그 맞은편에는 노벨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중앙 광장 즈변의 건물들. 왼쪽 사진이 노벨 박물관


약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져

건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근처의 가게에 들러

스웨덴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공예품 중 하나인

'달라호스(Dalahäst)'도 구경하였습니다.

달라호스'는 '달라르나 지방의 말'이라는 뜻으로,

스웨덴 중부의 달라르나(Dalarna) 지방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달라호스 인형은 스웨덴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가정에 행운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여겨져

선물용으로도 널리 사용된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혼례에서 주는

나무 기러기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게에서 장인이 직접 손으로 제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비싼 편이었습니다.

아내와 나도 여행 기념과 선물용으로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형태의

저렴한 말을 몇 개 샀습니다.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형태의 달라호스(Dalahäst)




바사(Vasa)호 박물관




스톡홀름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바사(Vasa)호 박물관이었습니다.


바사호 박물관(Vasamuseet)은

17세기에 만들었던 전쟁선

바사호(Vasa)를 전시하는 곳입니다.

바사호는 1628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발트해 패권을 위해 건조한 거대한 전함입니다.

길이 약 69 m, 높이 약 52 m로

당시 스웨덴의 기술과 힘을 과시하려는 상징적 전함이었습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함명을 자신의 왕조 이름을 따서 바사(Vasa)라고 지었습니다.



바사호 모형, 바사호 박물관, 사진: 나무위키



하지만 첫 항해 날,

항구를 떠난 지 20 분 만에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바사호는 2층 포열 갑판에

수많은 대포를 장착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이 때문에 무게중심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당시에는 선박의 안정성을 과학적으로 계산하는 기술이 부족하여,

설계자들이 직관과 경험에 의존해 배를 만들었는데,

국왕의 과도한 욕심과 간섭으로 인해

그나마 기술자들의 의견이 무시되었습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바사호는 원래 계획보다 훨씬 더 많은 대포를 실었습니다.

이는 선체 상부의 무게를 더욱 늘려

안정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렸습니다.


또한 발굴된 바사호를 분석한 결과,

배의 좌현과 우현의 두께와 무게가

미세하게 달랐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길이의 자를 사용한

두 명의 조선공이 배의 좌우를

따로 건조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비대칭성도 침몰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사호가 항해를 시작했을 때,

첫 출항을 기념하는 축포를 발사하기 위해

아래쪽 갑판의 포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배가 약간 기울자

이 열린 포문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출항 당시에는 바람이 잔잔했으나,

갑자기 강한 돌풍이 불었다고 합니다.

이미 불안정한 상태였던 바사호는

이 돌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고,

열려 있던 포문으로 물이 들어와

순식간에 침수되어 침몰했던 것입니다.


이 사고로 약 50명 이상의 승조원이 사망했고

배는 바닷속으로 잠겼습니다.


바다에서 인양되어 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는 바사호 선체


333년 동안 스톡홀름 항구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바사호는

1961년 대대적인 인양 작업을 통해

수면 위로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웨덴 과학자와 보존 전문가들은

목재 보존을 위해

폴리에틸렌 글리콜(PEG) 처리를

수십 년간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현재 선체의 98%가

원래 목재로 남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바사호 박물관은

거의 완벽한 상태의 17세기 전함을 볼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보니 규모가 대단했지만,

전함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화려한 장식들이 많았으며,

대포가 1층과 2층까지 가득 실려있었습니다.


바사호 박물관은 스웨덴의 자존심이자

동시에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는 장소입니다.

리더의 무리한 욕망과

기술자들과의 소통 부재,

이로 인한 설계와 제작의 실수로 인해

첫 항해에 침몰한 아이러니를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의사소통의 가장 큰 적은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 버나드 쇼


"The greatest enemy of communication is

the illusion that has taken Place."

- George Bernard Sh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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