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by 박용기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27년간 일했던 직장을 정년퇴직하고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둘째 딸의 아이를 떠맡아 키우고 있어 이제 막 돌이 된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하는 일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도와주는 사람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내를 두고 혼자 떠나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마침 둘째 딸아이가 제주시에 있는 병원에 잠시 파견 근무를 하게 되어 아이도 보여줄 겸 지난 일 년간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한 아내도 바람을 쏘일 겸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큰 딸도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돌이 막 지난 둘째 외손녀와 함께 14개월 된 큰 외손녀까지 4명의 여자를 동반하는 여행이 되었다.


둘째 딸이 순환 근무로 서울에서 잠시 내려와 일하는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아야 하고, 아이 둘이 놀 수 있는 비교적 넓은 거실이 있어야 하며, 잠을 잘 때엔 두 아이들을 따로 재울 수 있도록 침실이 두 개는 되어야 하며, 아이들의 이유식 등을 조리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바다 전망이 좋아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숙소를 찾기 위해 아내는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인터넷에 매달려 지냈다. 하지만 제주시 인근에서는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여 결국 제주시에서 조금 떨어진 금능해수욕장 인근의 한 펜션을 숙소로 정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구한 숙소 이건만 정작 도착해 보니 몇 가지 조건은 그런대로 만족시키긴 하였지만, 시설이 엉성하고 무엇보다도 주인의 실종된 서비스 정신 때문에 무척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퇴근 후 우리와 합류하여 지내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둘째 딸을 대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만은 나에게 여행의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게 해주는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 너머로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금능 해변의 새벽은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해가 뜨기 전 숙소를 나서 제주시를 향해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아침노을을 배경으로 기다랗게 누워 있는 한라산의 모습이 황홀하고, 왼편으로 펼쳐진 바다는 때로는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며 때로는 멀어지면서 운전하는 내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제주의 겨울바다를 만나기 위해 애월 해변에 차를 세우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길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해변이기도 하지만, 포구가 반달의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애월의 유래가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끄는 매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엔 아직 남아있는 아침노을 빛으로 물든 하늘과 맞닿은 탁 트인 겨울바다가 나만을 위해 놓여있었다. 제주의 검은 바위들과 모래 해변 위로 작은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겨울 아침의 바닷가. 이제까지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그 매력에 빠져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그곳엔 아직 남아있는 아침 노을 빛으로 물든 하늘과 맞닿은 탁 트인 겨울바다가 나만을 위해 놓여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하는 오래된 의문이 마음속에 떠 올랐다.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계산이 가능하였다. 해변에 서서 보이는 수평선까지는 대략 4.5 km에서 5 km 정도로 생각보다는 가깝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해변에 서서 보이는 시선의 끝은 높은 산에 올라 볼 수 있는 거리에 비해 상당히 짧다. 평상시엔 이보다도 짧은 거리만을 보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근시안적이었을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양병우 시인은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바로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아무도 없는 애월의 겨울 아침 바닷가에 서서 먼바다로부터 밀려와 발끝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을 보면서, 지난 수십 년간 가까운 곳만을 보면서 바쁘게 살아온 나를 만나고 그런 나에게 작은 평안과 자유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두 어린 외손녀들과 함께한 이번 여행은 솔직히 여행인지 전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아름다운 금능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던 아내에게나, 이른 아침 애월의 바다를 만날 수 있던 나에게는 오랜만에 가져보는 값진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금능의 에메랄드 빛 바다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양병우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바로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고독을 만나러 가는 것이고
자유를 느끼기 위해 가는 것이다

동굴 속에 머물러 지내다가
푸른 하늘을 보러 가는 것이다

겨울 바다에 가는 것은
갈매기 따라 날고 싶기 때문이다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



2013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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