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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Sep 26. 2021

 쓸쓸함과 따스함을 함께 품은 색, Brown

 

땅 위에 떨어져 구르는 낙엽, 갓 구워낸 초코 브라우니 한쪽 그리고 따끈한 커피 한 잔.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가을날에 어울리는 것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이들의 색깔이 모두 갈색이라는 점이다.

 


갈색은 가을의 떨어져 시든 낙엽에서 느껴지는 느낌처럼 외로움, 슬픔 그리고 고립감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갓 구워낸 구수한 냄새의 빵이나 따뜻한 커피 등을 연상시키는 따스함과 안락함 및 안전함 같은 긍정적인 느낌도 함께 가지고 있다. 갈색은 대지나 나무와 같이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색이며, 사람들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등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색이기도 하다.

 

갈색은 물리학적으로 볼 때 주파수가 600 나노미터 부근의 강도가 낮은 빛이다. 미술적인 관점에서는 빨간색과 노란색 중간에 위치하며 채도가 낮은 색이다. 우리말에서 갈색(褐色)은 한자어로 털옷 갈()’을 사용한다. 즉 동물의 털로 만든 옷 색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brown인데, 고대 독일어 brunaz 혹은 brun 등 어두운 색조의 갈색을 의미하는 말과 연관성이 있다. 우리는 갈색을 밤색이라고도 부르는데 외국의 경우에도 음식과 연관되어 커피색 혹은 초콜릿 색, 그리고 차(茶) 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갈색 물감의 역사

갈색 물감은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에도 사용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무려 BC 40,000전부터 산화철과 산화망간이 주성분인 천연 점토질 갈색 안료인 엄버(umber)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유명한 라스코 동굴 벽화 중 갈색으로 채색된 말 그림은 약 17,000년 전의 예술작품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갑오징어 등으로부터 만든 적갈색 잉크인 세피아(sepia)를 생산했으며, 다빈치나 라파엘과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도 세피아 잉크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라스코 동굴 벽화, 출처: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1912102050005#c2b


하지만 고대 로마에서 갈색 옷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중세의  프란시스코 수도회 수사들도 갈색 옷을 입었는데, 이는 겸손과 가난함을 상징했다고 한다. 당시 회색과 갈색은 가난한 사람들의 색으로 인식되었다.

 

미술에서 갈색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들은 점토가 기반이 된 다양한 갈색 안료를 사용하였으며, 북유럽에서 유화 기법을 최초로 사용한 화가로 알려진 얀 판 에이크(Jan van Eyck)도 갈색을 사용하여 초상화들을 그렸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더 많은 화가들이 갈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램브란트나 루벤스 그리고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같은 화가가 대표적이다. 이때 사용한 물감은 카셀(Cassel)이나 쾰른(Cologne) 지방의 흙이 주원료였으며 산화철과 토탄 등이 섞여있는 물감으로 반 다이크 브라운(Van Dyck brown)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의 화가 폴 고갱도 갈색을 사용하여 폴리네시아 사람들과 풍경을 많이 그렸다.  

 

갈색 눈동자




모든 사람들의 눈은 실제로는 갈색이다? 과학자들은 눈동자의 색을 결정하는 색소는 갈색의 멜라닌(melanin)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의 눈은 근본적으로 갈색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파란색 혹은 녹색의 눈은 왜 나타날까?

 

사람의 눈 가운데에 있는 눈동자에는 빛이 눈 안으로 들어가는 검게 보이는 부분인 동공이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홍채가 있어 빛의 세기에 따라 동공의 크기를 조절해준다. 동공은 투명하여 색이 없지만 동공을 통해 안구 내부로 유입된 빛은 거의 반사되지 않기 때문에 눈 안쪽의 어두운 부분이 검게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동자의 색을 말할 때는 바로 홍재(虹彩, iris) 부분의 색을 말한다.


홍채는 근육조직으로 앞쪽에 있는 얇은 상피세포(上皮細胞)와 중간 부분에 있는 두꺼운 기질(基質; 스트로마 stroma), 그리고 안쪽에 있는 내피세포로 나뉘는데, 상피세포와 기질 속의 멜라닌 색소 함유량과 기질의 세포 밀도 등이 눈 색을 결정하게 된다. 멜라닌 색소는 눈뿐만 아니라 머리카락 및 피부에도 존재하여 색을 결정하는 짙은 갈색의 색소다. 이 색소는 빛을 흡수하기 때문에 색소의 농도가 높을수록 어두운 갈색이 된다. 갈색 눈을 가진 사람들은 홍채의 기질 및 상피세포 모두에 멜라닌 색소를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55 % 에서 79 %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갈색 눈을 가지고 있다.

 

갈색 눈 다음으로 많은 눈의 색은 파란색이다. 우리가 서양 사람들을 일컬을 때 흔히 벽안(碧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유럽의 많은 부분과 유대인들 사이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파란 눈의 홍채에는 갈색 눈에 비해 멜라닌 색소의 양이 적게 들어 있다. 하지만 파란색 색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파란색 눈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빛의 산란 때문이다. 파란 눈의 홍채 내피 세포에는 멜라닌 색소가 있어 어두운 갈색을 띠지만, 기질에는 갈색 눈에 비해 멜라닌 색소가 거의 없고. 작은 입자들이 분산되어 있다. 빛이 들어가면 빛은 기질 속의 작은 입자들에 의해 산란되어 틴들 효과(Tyndall effect)가 나타난다. 즉 파장이 짧은 파란빛 계열의 빛이 산란되어 일부가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고 나머지 파장의 빛들은 어두운 내피 세포에 흡수되어 눈동자가 파란빛으로 보이게 된다. 즉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파란색 색소가 없어도 홍채 기질 속에서 빛의 산란에 의해 파란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땅과 흙과 나무의 색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우주인들은 지구가 마치 파란 구슬처럼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블루마블(The Blue Marble)’. 하지만 많은 경우 초록의 풀과 나무가 자라는 토양은 갈색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지표의 토양은 갈색을 띠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이러니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녹색 식물 때문이라고 한다.




식물은 시들거나 죽게 되면 잎과 줄기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때 식물 속에 저장된 탄소를 흙으로 가져오게 된다. 가을에 잎들이 단풍이 들고 떨어지게 되면 점차 부식되어 흙의 일부가 된다. 흙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작은 미생물들은 특수한 효소를 이용해 식물의 화학물질들의 결합을 잘게 쪼개 자신들의 먹이로 활용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식물의 잔해가 모두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고 그 먹이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미생물도 죽어 그 안에 있던 탄소는 역시 흙 속에 남게 된다. 이런 장시간의 순환과정을 통해 토양 속에는 탄소가 축적되게 된다. 탄소는 가시광선의 대부분을 흡수하고 갈색의 어두운 빛만 반사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갈색을 띠게 된다.


물론 모든 토양이 다 갈색은 아니다. 탄소가 많지 않은 토양의 경우 그 토양을 구성하는 광물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만일 토양에 산화철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면 붉은색 혹은 노란색 계열의 색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들에게 도화지에 나무와 하늘을 그리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파란 하늘과 초록의 나뭇잎 그리고 갈색의 나무줄기와 가지를 그릴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살아있는 나무들의 줄기와 가지들의 표면은 많은 경우 갈색이 아니다. 오히려 대체적으로 회색빛을 띠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나무의 줄기는 갈색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무로부터 만들어진 주변의 가구나 물건들이 대체적으로 갈색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를 잘라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목재는 정말 갈색이다. 나무는 나무껍질 바로 안쪽, 즉 껍질을 벗긴 통나무의 겉 부분에 해당하는 변재(邊材, sapwood)와, 안쪽의 심재(心材, heartwood)로 구분할 수 있다. 많은 나무들의 변재는 희거나 크림색을 띤다. 반면 나무의 안쪽 부분은 변재보다 짙은 갈색의 색조를 가지고 있다. 변재는 물과 무기염류를 뿌리에서부터 위쪽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 살아있는 조직으로 수분이 많고 화학물질의 침착은 없어 밝은 색을 띤다. 그러나 심재는 수분이 적은 죽은 조직으로 녹말, 당분, 타닌, 색소 등 화학물질의 침착으로 색깔이 갈색으로 짙어진다. 변재가 무르고 부드러운 반면, 갈색을 띠고 있는 심재는 강도, 내구력, 비중 및 경고성 등이 높다.




음식과 갈색

사과를 깎아 접시에 놓아두고 조금 지나면 사과는 갈색으로 변한다. 사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이나 야채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색의 변화는 공기 중의 산소에 의한 산화가 원인이다. 사과의 세포 속에는 페놀과 효소인 페놀레이스가 있는데 신선한 상태에서는 효소가 조직 속에 잘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사과를 자르거나 으깨게 되면 효소가 공기 중 산소와 접촉하여 페놀을 갈색의 멜라닌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산화과정을 효소적 갈변 반응(enzymatic browning)이라 부른다.


사과 등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흔히 레몬 즙이나 식초 등을 뿌리는데, 이는 효소가 산성 환경에서는 작용이 둔화되기 때문이다. 또 물이나 설탕을 칠하거나 랩으로 쌓아두면 공기 중 산소가 효소에 도달하는 것을 막게 되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또한 냉장고에 넣어 온도를 낮추면 역시 효소의 활동을 둔화시킬 수 있어 갈변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


효소적 갈변 반응은 이처럼 과일이나 채소의 외관이나 질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음식의 향과 맛을 더 좋게 만드는데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이 없었다면 우리는 갈색의 맛있는 차나 초콜릿을 마시거나 먹을 수 없을 것이다. 홍차나 우롱차 등이 발효를 거쳐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대부분 잘 알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에 효소에 의한 발효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초콜릿은 코코아 분말과 코코아 버터로부터 시작되지만, 코코아 분말과 버터를 얻는 일은 커피보다도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코코아 분말의 원료인 카카오나무 열매는 쓰고 맛없어 우리가 알고 있는 달콤한 초콜릿과는 180 도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매력적인 갈색의 초콜릿 속 코코아 향과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발효와 경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카카오 포드와 카카오 빈



카카오나무에 달린 열매를 카카오 포드(pod)라고 부르며 껍질 속에는 점성이 있는 펄프(pulp)가 가득 차있고 그 속에 아몬드 형태의 씨앗(cacao bean)이 들어 있다. 열매를 따 포드를 연 후 24-48시간 이내에 발효를 시키기 시작해야 하며, 일반적으로 5-7일 동안 발효한다. 발효 중 미생물이 콩으로부터 펄프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효모는 펄프에서 자라면서 펄프 속의 당분을 에탄올로 변환시키는 발효를 담당한다. 그 후 박테리아가 에탄올을 아세트산으로 산화시킨 다음 이산화탄소와 물로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열이 발생되고 온도가 높아진다. 펄프가 분해되고 젖산과 아세트산이 생성된다. 아세트산은 결국 콩을 죽여서 세포벽이 파괴되고 이전에 분리되었던 여러 물질들이 섞이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카카오 콩 내부에서는 효소의 작용에 의해 산화 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경화 과정(curing process)이라 부른다. 이 단계를 통해 카카오 콩은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독특한 초콜릿 맛과 향의 시작인 중요한 향미 전구체를 가지게 되며 갈색을 띠게 된다. 그 후에도 세척, 로스팅, 지방이 풍부한 코코아 버터와 코코아 고형분의 분리 등의 많은 과정을 거쳐야 짙은 갈색의 달콤한 초콜릿으로 탄생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가면 붉고 노랗게 물들었던 가을 잎들이 떨어져 낙엽이 되고 점차 밝은 빛을 잃고 갈색으로 변해간다. 가을은 이처럼 퇴락의 쓸쓸함을 지니고 있지만, 밤송이 속의 탐스러운 짙은 갈색의 알밤과 같이 결실을 선물하기도 한다. 찬바람이 불면 따스한 조명이 있는 아늑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나 핫초코 한 잔을 마시면서 쓸쓸함과 따스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색, 갈색을 즐기고 싶다.




* 이 글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사보 <KRISS> 2021 AUTUMN에 게재된 저의 과학칼럼입니다.

* 이미지 소스: pix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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