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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Dec 26. 2021

정렬과 두려움을 함께 품은 색, Red

Science behind colors


 

몇 년 전 남프랑스 여행 중 프로방스의 자그마한 중세 마을인 루시옹(Roussillon)이라는 마을에 갈 기회가 있었다.
붉은 황토 산 위에 지어진 마을로 프랑스어로 붉은색을 의미하는 루주(rouse)와 같은 어원을 가진 붉은 마을이다.
집들이 붉은 것은 주변의 오커(Ochre)라는 붉은 황토로 지었기 때문이다.
바로 루시옹 주변이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던 붉은 안료의 원료인
오커의 세계 최대 매립지 중의 한 곳이기 때문이다.
루시옹(Roussillon)



자연에서 보이는 붉은색

 

주변이나 자연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붉은색을 볼 수 있다. 저녁녘 붉은 노을, 5월의 붉은 장미와 가을의 단풍과 붉게 익은 열매들, 붉은 협곡으로 유명한 그랜드 캐년, 붉은빛을 띠는 화성,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붉은 피까지.

 

저녁녘의 노을이 붉은 이유는 빛의 레이레이 산란(Rayleigh scattering)이라는 현상 때문이다. 백색광의 태양 빛이 대기 층을 지나 우리 눈에 오는 동안 빛은 공기 분자나 공기 중에 있는 입자들에 의해 산란이 일어나게 된다. 파란빛과 같이 파장이 짧은 빛일수록 산란이 많이 일어나 우리 눈에 도달하는 태양의 빛 속에는 파란빛의 강도가 약해지게 된다. 석양의 경우 태양의 고도가 낮아 태양빛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대기층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파란색이나 초록색과 같은 짧은 파장의 빛 성분이 거의 다 산란되어 흩어진다. 그 결과 노랗고 붉은 계열의 빛만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 태양이 붉게 보이며, 구름이나 대기 중 비교적 큰 입자들에 의해 붉은빛마저 산란되어 서쪽 수평선 부근의 하늘도 붉은빛으로 물들게 된다.

 

미국 그랜드 캐년 (사진출처: Pixbay)


한편 그랜드 캐년의 붉은빛은 적철석(赤鐵石, hematite) 혹은 붉은 황토 오커 때문인데 모두 산화철이 주성분이다. 이 산화철 때문에 화성도 붉은빛을 띠고 있다. 피 속에도 철분이 있기 때문에 피가 붉은빛을 띠게 된다.

 

피 속의 적혈구 속에는 단백질인 헤모글로빈이 있고 헤모글로빈 속에는 철 원자가 있어 산소와 결합하여 산소를 운반하게 된다. 바로 이 철 원자가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에 피가 붉게 보이게 된다. 만일 피 속에 철 대신 다른 금속 원자가 들어 있다면 다른 색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냉혈동물들은 철 대신 구리가 들어 있어 피가 파란색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맥은 왜 푸른색으로 보일까? 정맥은 심장으로부터 나온 피가 동맥과 모세혈관을 통해 산소를 운반한 뒤 다시 심장으로 피를 돌려보내는 순환 통로다. 피의 색은 산소의 함유량에 따라 다른 색조를 띠게 되는데, 산소가 많이 들어있는 동맥의 피는 밝은 붉은색이지만, 순환과정에서 산소를 내보내고 탄산가스를 회수한 정맥의 피는 어두운 붉은색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정맥이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건 이 때문은 아니다. 정맥이 푸른색으로 보이는 건 순전히 빛의 성질 때문이다. 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붉은빛에 비해 사람의 피부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대부분 반사되어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게 된다. 정맥은 피부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입사된 빛 중 붉은 계열은 혈관에 흡수되고 푸른빛이 더 많이 반사되어 푸른색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출처: <KRISS> 2021 Winter)


붉은색의 인지

 

둥그런 무지개의 맨 위쪽에는 붉은색이 있고, 아래 쪽에는 보라색이 있다. 붉은색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의 한쪽 끝인데, 사람들은 파장이 약 625 나노미터에서 740 나노미터 사이의 빛을 볼 때 붉은색이라고 인지한다. 붉은색은 가시광선에서 파장이 가장 긴 빛이며, 파랑, 초록과 함께 빛의 3원색(RGB 모델)의 하나이다. 붉은빛보다 파장이 조금 더 긴 빛을 적외선이라 하고 눈으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열의 형태로 감지할 수 있다. 빨간색은 망막에서 S 또는 M(짧은 파장과 중간 파장) 원추세포에는 민감하지 않고 주로 L(긴 파장) 원추세포에 의해 감지된다.

 

영장류는 인간이 볼 수 있는 빛의 스펙트럼과 유사한 빛을 구별할 수 있지만, 개와 소와 같은 많은 포유류는 파란색과 노란색은 보지만 빨간색과 녹색은 구별하지 못한다. 빨간색과 녹색은 모두 노란색이나 갈색 색조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투우장의 소는 투우사가 흔드는 망토의 붉은색에 흥분하는 게 아니라 망토의 움직임에 동요한다고 한다.  


붉은색은 검은색과 흰색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인지하는 색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색을 구별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보는 색도 빨간색이다. 또한 뇌손상을 입어 일시적인 색맹이 된 사람이 회복되어 다시 색을 보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보는 색도 빨간색이라고 한다.


영장류들이 다른 포유류에 비해 빨간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생존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붉은색으로 익은 과일을 잘 볼 수 있어야 했고, 위험을 알리는 피 또한 붉은색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붉은색은 질병과 화를 막아주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색이기도 했다. 또한 얼굴색이 붉게 변하는 것을 통해 상대방이 화가 났거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는 사회적 신호로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출처: <KRISS> 2021 Winter) 2021 겨울호)


붉은 물감의 역사

 

많은 문화권에서 색 이름이 붙여진 시간과 방법이 다르지만, 색의 이름이 만들어진 순서는 공통점이 많은데, 검정 다음에 흰색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고 그다음으로 유채색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유채색 중에는 빨간색이 가장 먼저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그다음이 녹색, 노랑 그리고 파랑의 순서로 이름을 얻었다. 아마 빨간색이 사람들의 주의력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빨간색은 대단히 다양한 색상을 가진다. 밝은 노란색을 띤 주홍(朱紅, 스칼렛 scarlet) 색에서부터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색(버밀리온, vermillion), 그리고 푸른빛이 도는 붉은 색인 크림슨 색(crimson)까지 분포하며, 색조의 밝기에 따라 옅은 빨간 분홍색에서 짙은 빨간색 버건디(burgundy)까지 다양하다. 버건디(burgundy)는 프랑스의 포도 산지로 유명한 브르고뉴 지방의 이름에서 왔으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의 색을 뜻한다.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했던 붉은 물감은 오커(Ochre)라는 붉은 흙이다. 오커는 철의 광석인 자철석(헤마타이트, hematite)이 섞여있어 붉은색을 내는 점토다. 기원전 15,000년에서 16,5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바로 오커로 그려졌다. 또한 과학자들은 40,000년 전 석기시대의 조상들이 몸에 붉은 황토를 칠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들은 시신에도 붉은 가루를 칠해 나쁜 기운을 막거나 시신이 부패해 나는 냄새를 중화시켰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밝은 주홍색(朱紅, 스칼렛 scarlet)에서 어두운 벽돌색까지의 빨간색을 가지는 염료 중에 버밀리온(Vermilion)이 있다. 이 물감은 황화수은(mercuric fulfied, HgS)이라는 수은의 광물인 시나바(cinnabar)로부터 얻어진다. 이집트에서부터 사용되었던 이 붉은 물감은 매우 유독한 물질이다. 하지만 고대 고마 사람들은 이 빛나는 붉은색을 좋아했으며 이 물감은 폼페이의 벽화에도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시대에 시나바는 스페인의 알마덴이라는 광산에서 채취했는데, 이 유독한 환경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죄수이거나 노예들이었다. 중국에서는 4세기경부터 시나바 가루로부터 합성된 버밀리온 물감을 만들었으며, 12세기부터는 이 붉은 물감이 중국 송나라 때 붉은 칠기 제작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버밀리온 물감은 유럽으로 건너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물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밝은 주홍색에서 어두운 자줏빛이 도는 갈색으로 변하는 단점이 있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황화수은이 어떤 이유로 불안정해져 금속 수은이 분리되면서 색이 어두워진다고 믿고 있지만 정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크림슨(crimson)은 강렬하며 밝고 짙은 빨강에 약간의 파란색이 섞여 보랏빛이 도는 색상이며 이 색상을 내는 물감을 말한다. 이 물감은 지중해 지역에 서식하는 케르메스 참나무의 수액을 먹고 사는 케르메스(kermes)라는 깍지벌레의 암컷을 말려 추출한다.

 

카르민(carmine)도 코치닐(cochineal)이라는 멕시코 등 중미 열대지방의 선인장에 사는 작은 연지벌레의 암컷으로부터 얻어지는 유기 염료이다. 그 속에 들어있는 카르민산을 추출하여 물감으로 사용하는데, 깊은 크림슨 빨간색을 만들 수 있어 램브란트나 베르메르 등 15세기와 16세기의 많은 화가들이 사용하였다. 한편 코치닐 물감은 요즈음에도 요구르트 등 식품의 색을 내는 데 사용하는 식품 첨가물이기도 하다. 색이 변하지 않고 안정되어 있어 많이 사용되지만, 곤충에서 추출하기 때문에 식품 착색제로 사용하는 데에 거부 반응이 있어, 세계적인 미국의 유명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는 그동안 일부 음료나 스무디 및 케이크 등에 사용하던 카르민을 2012년부터는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토마토 등에서 추출한 리코펜으로 대체하였다.

 

연단(鉛丹, minium), 광명단 혹은 적연(赤鉛)이라고 부르는 산화납(Pb3O4)으로 만드는 붉은색 물감도 있다. 연단은 중국의 한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는데 납 성분 때문에 이 물질도 독성이 강하다. 반 고흐는 이 물감을 많이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이 물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에 노출되면 빛이 바래는 단점이 있다. 중세 필사본 작업을 하던 장인들이 이 물감을 많이 사용했으며 그들을 미니어터(miniator)로 불렀는데, 그로부터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형의 모형을 뜻하는 "미니어처(miniature)"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출처: Pixbay)


붉은색의 심리학


붉은색은 강력한 색으로 사랑과 증오와 같이 마음속 감정을 건드리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남성들을 상대로 설문 연구를 수행한 결과에 의하면, 남성들은 동일한 여성이라도 붉은색의 옷을 입었을 때가 다른 색 옷을 입었을 때에 비해 더 매력적이며 섹시하게 느꼈다고 한다. 2004년 하계 올림픽 경기 중 권투, 태권도 및 레슬링 경기 결과를 분석한 결과 붉은색 옷과 머리 보호장치를 착용한 선수들의 승률이 파란색 옷을 입은 선수에 비해 더 높았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붉은 옷의 선수가 심판들에게 보다 강력한 인상과 함께 우호적인 느낌을 주어 대등한 경기를 했을 경우 유리한 판정을 받을 수 있고, 파란색 옷의 상대방에게도 위압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축구에서 페널티 킥을 찰 때에도 골키퍼가 붉은색 옷을 입었을 때 페널티 킥을 차는 사람들의 득점률이 낮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옷 색깔과 장신구의 색을 다르게 하여 서빙하도록 한 후 손님들로부터 받은 팁의 금액을 조사한 결과 붉은색 옷을 입거나 장신구를 한 종업원이 다른 색 옷을 입은 종업원에 비해 30 % 이상 더 많은 팁을 받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붉은색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영국의 로체스터대학과  독일 뮌헨 대학이 연구에 의하면 IQ 테스트나 중요한 테스트 이전에 빨간색을 잠깐 본 경우 연구 참가자들의 실제 수행 능력이 저하되었다. 연구에서는 빨간색과 회피 동기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도 밝혔다.

 붉은색은 때로는 강렬함과 정렬과 같은 긍정적 느낌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나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붉은 색은 잘 익은 붉은 사과 하나나 은은한 향기가 나는 붉은 포도주 한 잔, 그리고 예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의 붉은 장식처럼 우리에게 맛과 멋을 선물하면서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 준다. 남프랑스의 붉은 황토 마을 루시옹의 낯설지만 강렬한 붉은색의 기억이 오래 남아있다.


루시옹(Roussillon)



#red #붉은색 #색의_과학 #2021년


* 이 글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사보 <KRISS> 2021 겨울호에 실린 제 과학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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