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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기 Jan 16. 2022

시간 여행

망각의 과학



코로나-19 때문에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한 해가 가고 또 겨울을 맞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어쩌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일 것 같다. 그래서 오래도록 이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도 인생을 좀 살아온 사람이라면 겨울 속에서도 다가올 봄을 생각하면서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꽃 사진을 찍는 나 역시 사진에 담을 꽃들이 사라진 추운 겨울이 되면 지난해 그리고 그 전 해의 사진 폴더들을 돌아보면서 언제쯤 어디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를 둘러보면서 새 봄에는 어떤 사진을 찍을까 생각하곤 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날의 기억들


이런 시간 여행을 하다 문득 나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의 끝 지점은 언제쯤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나에겐 초등학교 입학식이 종착역인 것 같았다. 커다란 흰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여자 선생님과 친구들을 수줍게 만났던 희미하지만 제법 구체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이마저 편집되고 왜곡되어 있겠지만 그 이전의 어린 시절은 거의 기억해 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왜 아주 어릴 적 기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오래전까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어 몇 년 전 만 4살이 된 외손녀에게 혹시 지난봄에 한 일들이 기억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꽃을 좋아하는 이 아이가 바로 전 해의 봄 어린이집을 다녀오면 외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민들레, 제비꽃, 씀바귀, 애기똥풀, 그리고 강아지풀 등 봄꽃을 꺾어와 화병에 꽂아 놓기를 좋아하였었기에, 얼마나 기억하는 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난봄의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민들레를 꺾었던 기억은 난다고 하였다. 


연구에 의하면 이 정도의 어린아이들도 꽤 어릴 때의 일들을 기억할 수 있으며 대략 2년 전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초기의 기억을 잃게 되어 기억해 낼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보통 3.5세 정도의 기억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을 ‘아동기 기억상실’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명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억의 저장 장치도 덜 완성되어 있어 많은 부분이 기억으로 형성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장된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는데 필요한 뇌신경들의 연결 또한 발달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후에 더 많은 정보가 기억으로 쌓였을 때 초기의 기억을 찾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심리학자인 패트리시아 바우어는 3살 배기의 기억을 ‘분류 기능이 없는 이메일 박스’와 같다고 비유하였다. 아무렇게나 뒤섞여 가득 쌓인 이메일 정보를 이름이나 제목 혹은 날짜 별로 분류할 수 없다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최초의 기억 시기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릴 때 자라난 환경도 중요하다고 한다. 취학 전에 엄마가 과거의 경험에 대해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묻고 설명해주는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어릴 때까지를 기억하였다고 한다. 지난 경험에 대해 감성이 가미된 스토리 형태의 대화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보다 확실한 기억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더 어릴 때까지를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딸이 아들보다는 엄마와 이러한 형태의 대화를 더 많이 하게 되어 어릴 때의 기억을 잘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경우 어른이 되어도 평균적으로 2.5세까지를 기억한다고 한다. 이는 이들이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 방식으로 어린아이들과 과거에 대해 나누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아동기 기억상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아픈 아이들을 위한 병원(Hospital for Sick Children)의 뇌신경학자인 폴 프랭크랜드(Paul Frankland)와 쉬나 조셀린(Sheena Josselyn) 부부가 이끄는 연구팀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게 되는 ‘아동기 기억상실’에 대한 단서가 될 연구 결과를 2014년에 발표하였다. 그들은 다 자란 성체 쥐에서 새로운 신경 세포 생성을 연구하였는데, 해마라는 뇌 부위에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증가될 때 설치류들의 기억력이 얼마나 증가되는지 궁금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는 연구팀의 원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즉 새로운 신경세포가 증가하면, 동물들의 기억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모순처럼 보였지만,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뇌신경 세포가 성체의 해마에 통합될 때 그 신경세포들은 기존의 확립된 기억의 회로에 통합되게 된다. 만일 그 회로에 저장된 정보가 그대로 있어 새로운 신경세포의 회로와 더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면 그 정보에 접근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만다. 해마는 뇌에서 장기간의 기억이 저장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된 정보를 지우고 새로운 정보를 덮어쓰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든다. 즉 새롭게 추가된 뉴런은 오래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위한 길을 열어주는데 유용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신생아 쥐와 성인 쥐를 반복적인 전기 충격을 통해 전기 충격을 받는 환경을 두려워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런데 유아 쥐는 훈련 후 단 하루 동안만 부정적인 경험을 기억하는 반면, 성인 쥐는 몇 주 동안이나 부정적인 기억을 유지했다. 이 차이는 신경 증식의 차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유아 쥐는 새로운 신경 증식이 성체 쥐에 비해 활발하기 때문에 기억이 빨리 지워졌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학습 후 새로운 뉴런의 성장을 유전적 및 화학적으로 억제시켰더니 갓 태어난 쥐도 두려움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성체 쥐의 경우, 뉴런 증식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진 활동인 4~6주간의 규칙적인 운동을 시켰더니 이전에 배웠던 공포의 지속 기간이 감소되었다.





기억과 망각

 

프랭크랜드 연구팀의 연구 이전에도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의 론 데이비스(Ron Davis)의 초파리 연구나 캐나다 맥길대학의 올리버 하트(Oliver Hardt)의 쥐 연구 등을 통해 망각은 기억을 위한 능동적 과정의 하나임이 밝혀졌다. 2012년 데이비스는 초파리의 기억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이 연구를 통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망각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하트는 쥐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뇌신경 사이의 연결 강도가 높아지면 기억이 포유류의 뇌에 암호화되어 저장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연결의 강도는 신경과 신경을 연결하는 부위에 위치한 좁은 간격인 시냅스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수용체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AMPA라고 알려진 수용체는 기억이 온전하게 유지되기 위해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용체가 안정적이지 않고 시냅스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몇 시간 또는 며칠 안에 크게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경우 기억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망각이 능동적 과정임을 시사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AMPA 수용체가 없어지는 메커니즘을 차단하면 망각을 예방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쥐의 해마에서 AMPA 수용체 제거 메커니즘을 차단했을 때, 쥐들은 물체의 위치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뇌 연구자들은 사람의 뇌도 비슷한 방식으로 동작할 것으로 생각한다. 캐나다의 신경회로와 기계학습을 연구하는 블레이크 리처드스(Blake Richards)는 새로운 경험을 일반화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우리의 뇌가 통제된 망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공원에서 갑작스럽게 개의 공격을 받는 사건을 경험했다고 하자. 이 사람이 개가 갑자기 움직여서 으르렁거리고 물려고 달려들었던 기억뿐만 아니라, 개의 늘어진 귀, 주인의 티셔츠의 색깔, 그날 태양의 각도와 같은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세부적 기억은 미래에 또 다른 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경험의 일반화를 방해하게 된다. 반면 세부 사항을 버리고 중요한 요지만 기억한다면 새로운 상황에서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즉 공격 전 개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나 으르렁거림 등 일반화된 핵심사항만 기억하는 것이 다른 환경에서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만든다. 


특별히 뛰어난 자전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Highly superior autobiographical memory, HSAM)이나 심각한 자전적 기억력 결핍증(severely deficient autobiographical memory, SDAM)의 사람에 대한 연구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알 수 있다. HSAM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어떤 특정한 날에 자신이 입었던 옷이나 차림새 등을 정확히 묘사할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의 자신에 관한 정보를 기억하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에 비해 특별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오히려 강박적인 성향이 더 큰 경향이 있다. 


한편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력이 현저히 저하된 SDAM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특정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고를 요하는 직업에서 특히 잘 적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능력은 그들이 많은 기억들로부터 짓눌리지 않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문제 해결 능력이 우수하다. 




HSAM이나 SDAM 같이 기억력에 있어 특별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도 망각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연구자들은 말한다.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의 앤더슨 교수팀은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장치(fMRI)와 자기 공명 분광장치(MR spectroscopy)를 이용해 해마의 억제 신경전달물질인 가바(GABA, γ-아미노뷰티르산) 수치의 변화를 통해 능동적 망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fMRI 장치는 뇌 안의 혈액 흐름을 관찰하고, 자기 공명 분광장치는 화학적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다. 특정 생각을 떨치려고 시도하는 실험 참가자들을 검사해 본 결과 가바 수치가 높을수록 전두엽 피질이 해마를 더 많이 억제하고, 더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능동적인 망각은 뇌의 특정 신경전달물질인 가바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앤더슨 팀의 연구는 그동안 잘 이해할 수 없던 뇌질환 치료에도 해답을 제공한다. 항불안제인 벤조디아제핀이라는 약은 가바 수용체의 기능을 높여 불안감을 줄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앤더슨팀의 연구 결과 전두엽 피질이 해마에게 생각을 억제하도록 명령할 때 뇌에서 가바의 농도가 높아진다면 그 명령이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지난 10년 동안 연구자들은 망각을 중요한 연구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진화는 기억하는 미덕과 잊어버리는 미덕 사이에서 우아한 균형을 이루었다”라고 말한다. 적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억하고 또 더 잘 기억하기 위해 망각한다. 앞으로 망각에 대한 이해가 더 많이 진전되면 망각의 오작동으로 발생하는 알츠하이머 병에 대한 대처 방법도 보다 효과적이 될 것이다. 




*이 글은 <계량과 측정> 2021년 겨울호에 실린 제 과학칼럼입니다.

** 이미지 출처: Pix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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