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데 동네가 왠지 시끌벅적하다.
집에서 몇 집 건너 이웃집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고기 삶은 냄새와 떡 찌는 냄새가 동네 개들의 코끝을 자극했는지 연신 짖고 있었다.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지금처럼 새장 같은 아파트가 주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고 주택이 밀집된 동네가 있던 나의 어린 시절,
동네 환갑이나 칠순 혹은 돌잔치가 있으면 음식을 장만할 때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함께 만들었다.
그리고 실컷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은 서로 나누어 가져 갔다.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덕담이 오가고 아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날이었다.
요즘에야 뷔페식당이나 호텔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고 손님들은 봉투 하나에 돈을 채워가면 되지만 70년대 초만 해도 음식을 잔치집에서 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을 해주던 인간미 넘치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 강아지 쫑이도 고기 냄새에 환장을 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주 난리가 났다.
장난 끼가 발동한 나는 꼬리 흔들고 난리 난 귀여운 쫑이의 머리를 '꽁' 하고 쥐어박는다. 오늘은 음식 냄새 때문인지 낑낑거리며 배를 까뒤집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재미없다. 녀석 약 올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늘은 강아지도 뭔가 기름진 음식을 먹는 줄 아는지 기대하는 모습이다.
나의 다정스럽고 어머니, 사랑으로 늘 맞이 해 주시는 어머니 얼굴이 전보다 더 밝은 모습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장래 영감님(예전 70년대 초에는 고등고시라 하여 사법시험과 행정고시를 합쳐서 고등고시라 했다. 그리고 옛날 조선에 관직에 오르면 판서 이하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는 영감님이라 불렀다. 그 풍습이 그 시절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오시냐며 난리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말씀에 피식 웃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살짝 한 번 쥐어 박고는
"열심히 공부해 ㅇㅇ네 집 아무개가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그 집 지나면서 봤지?"
그때 난 겨우 초등학교 삼 학년이었다. 공부가 뭔지 고등고시가 뭔지도 모르는 나이였다.
고기를 삶고 떡을 찌던 집의 대학생 형이 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 뭘 알겠나!
고기 먹고 떡 먹으면 그것으로 입이 헤벌쭉 해진다.
세상은 참 잔인하다. 합격자의 기쁨이 있다면 마냥 시험에 떨어지는 형들도 있었다. 그 집은 초상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죄인이 되고 나이만 먹어 간다. 그런 사람이 동네에 한 둘은 꼭 있었다.
좋은 학교 좋은 학과를 나오고 입신양명을 위해서 고시 공부에 매진했지만 계속 시험에 떨어지고 나이는 먹고 결국 시험을 그만둔다. 그만둔 사람은 사회부 적응자가 되어 간다.
이것도 저것도 되지 못해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아니면 우리 같은 아이들 집에 모아 놓고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부모는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시험에 언제 될 것인지 용하다는 철학관이나 점집을 다니며 사주를 보고 굿도 한다.
취직을 해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나마 동네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은 다행이지만(그 시절에는 집에서 하는 사설 과외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은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검은 뿔테 안경 쓰고 운동복에 슬리퍼 질질 끌고 이리저리 골목을 다니는 게 전부였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그런 고관대작의 길을 가는 과는 가고 싶지도 않았고 갈 실력도 안되었고 흥미도 없었다. 학교 동기들 중에서는 입신양명을 바라는 친구들도 많았다. 입신양명을 위해 영광과 좌절이 함께하는 고시의 길을 걸었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을까?
누렇게 뜬 얼굴에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잠을 아껴가며 공부를 한 친구들은 노력의 보람이 있는지 달콤한 열매를 따먹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실패한 동네 형의 몰골을 한 친구들도 생겼다.
친구들과 술자리에 기가 죽어 끝에 앉아 주는 술을 홀짝이다가 혼자 잔뜩 취해 분위기 깨고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그 친구는 마음의 한 구석의 때를 한 잔 술로 씻고 다시 공부를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그들은 꿈을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자신에 대한 실망, 주위 사람들이 눈 때문에 어딘가 꽉 막힌 사람처럼 보였고 차츰 친구들과 만나는 것에도 거리를 두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잊힌 인물이 되어 갔다.
몇몇은 아에 소식마저 끊고 살기도 한다.
도시의 답답함이 싫어 사십을 넘어서 시골살이를 했다. 성인이 되고 아파트가 들어선 도시에서는 동네잔치가 사라졌지만 시골에 와 보니 아직도 중요시험에 합격했다고 플랑카드에, 음식을 만들어 돌려 먹으며 합격자의 부모들은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를 받는다.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가 있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어릴 때 봐 왔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조용한 시골에 여름휴가 철만 되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복잡한 휴가지보다는 그래도 부모님이 계시는 시원한 시골에서 며칠 쉬는 것도 찌든 도시의 생활의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휴가가 집중된 때라 마을은 때 아니게 사람들로 북적인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마을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여름 해는 길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아직 밝은 기운이 남아있다.
마당에 나와 검둥이 녀석 노는 모습을 본다. 녀석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마당에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다닌다. 서산에 해가 지고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망중한에 빠져든다.
넋 놓고 서산을 바라고 서 있는데 검둥에 녀석 짓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집 마당으로 사람 셋이 걸어오고 있다.
자세히 보니 한 분은 윗집에 사시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안면이 좀 있는 읍에 사시는 분이었다. 다른 한 분은 육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약간 수줍은 듯,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다 저녁에 어쩐 일인가 싶었다. 윗 집 아저씨가 멋쩍은 웃음을 띠며 저녁은 먹었냐고 묻는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지만 일찍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시골에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벌써 먹었다.
함께 온 분들과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청했다. 달리 앉을 곳도 없어 식탁에 앉아 시원한 감주를 한 잔 드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사주를 봐줄 수 있냐고 물었다.
어느 분이 보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낯선 아주머니가 이 깊어가는 여름밤에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벽에 걸린 시계로 괘를 만들어 보았다.
저녁 8시를 넘은 시간에 '택수곤' 괘가 나왔다. 네 번째 효가 움직인다고 나왔으니 자식에 대한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머니가 내민 사주는 아들의 사주였다. 결혼을 일찍 했는지 아들의 나이가 꽤 되었다.
아들의 사주를 살폈다.
사주에 공부 줄이리는 게 있었다. 가난한 선비의 삶이라고는 하지만 공부만 하는 사주팔자다.
선생님이나 교수 같은 직업을 가지면 좋은 사주이다.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딘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눈빛이다.
당연하지! 서울에서 사는 사람이니 시골에서 집에서 허름하게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큰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사주를 살폈다.
태어난 날의 기운을 도우는 오행이 잘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나 가르치는 일을 하는가라고 물으니 아니라고 답했다.
나이가 있어 계속 공부할 사람은 아닌 성 싶어 공부를 계속하냐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긴 한 숨을 내 쉬고 사법 시험공부를 하다가 올해부터 접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는지 집의 마루가 꺼지나 싶을 정도였다.
함께 온 분이나 이웃 어른도 사주의 주인공이 공부도 잘했고 명문대를 입학했을 때에는 세상을 다 쥔 듯했다고 말한다.
속으로야 자기 팔자니까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찾아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왜 법대를 갔는지부터 물어보았다.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문과반 학생이었고 자연스럽게 성적에 맞추어 좋은 대학에 법대를 갔다. 곧 입신양명하리라는 주변의 모든 기대 속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세월은 가고 있지만 아들의 합격 소식은 저만치 먼 곳에 있었다.
지쳐가는 주변 사람보다 공부하는 사람은 주변의 시선을 더 힘들어했다. 십여 년 넘게 한 공부를 접을 때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문제는 공부를 그만둔 뒤부터 아들의 모습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세상살이를 포기한 듯했다. 주변의 차가워진 눈초리에 내일모레 사십을 바로 보는 아들은 점점 더 기가 죽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나니 뭐 별다르게 할 일도 없다. 여기저기 자리 잡은 친구들에게 점심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고 배운 도둑질이 법 공부를 했으니 법률사무소에서 알바나 하는 정도였다.
같이 공부해서 누구는 영감님 소리 듣고 있는데 자신은 그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까!
그런 일도 오래 하지 못하고 빈둥대기만 한다. 자존심이 상하겠지!
엄마에게는 용의 알 같은 존재가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사주 보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휴가를 이용해 은둔자를 찾아온 것이다.
사주를 보니 자신의 일주를 생하는 공부 줄은 있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관의 자리가 없었다.
입신양명의 출세보다는 공부하는 학자가 딱 어울릴 팔자다.
나이가 사십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어디 취직할 곳도 없다. 그렇다고 이제 공부는 지긋지긋하다고 하니 더 이상 시험에 매달리게 할 수도 없다고 한다.
하나뿐인 아들이니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걱정되는 한숨에 땅이 꺼진다.
사주의 운이 자신이 태어난 날의 오행에 좋은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는다.
고시가 아니고 어디 학교 국어 선생이나 역사 선생을 하면 좋은 사주였는데 운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고 과를 정할 때 법대를 가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주변에 용하다는 철학관과 점집을 가서 진로를 물어도 크게 성공한다고 법대를 보내면 좋겠다고 하여 법대를 갔고 아들도 순수히 법대를 가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주를 가진 것과 명예를 얻는 사주는 전혀 다르다.
관의 힘이 없는 사주에 명예를 얻겠다고 공부를 했으니 "십 년 공부 도루 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엄마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고 함께 온 두 분은 그녀를 위로했다.
어떻게 살면 되겠냐고 물었다.
공부 줄이 있으니 선생님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이미 때가 늦었고 그나마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학원 강사나 논술학원 같은 것을 경영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하늘이라도 뚫을 듯하던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한순간 무너졌는지 '휴~우' 하는 숨소리만 크게 울렸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커다란 돌 짐을 메고 가는 듯 무거워 보였다.
운이 없었다. 아무리 공부 잘하는 사주를 타고났으면 뭐하나 소위 말하는 '관운'이 없는 것을.
인생을 살며 사람들은 운이라는 것을 믿는다. 실제로 자신들이 경험해 보기 때문이다.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당연히 된다고 생각하던 일이 되지 않을 때가 있지 않는가!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지만 전쟁터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작열하는 전쟁터에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지 않던가.
바로 사람에게 있는 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운을 알려면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볼 줄 아는 지혜을 키워야 한다.
그날 나를 찾았던 분의 아들은 자신이 여기에 적성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함과 주위의 눈이 그를 자신과 맞지 않는 공부로 내 몰았다.
그는 문학과 철학 역사를 공부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번역가가 되어 좋은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했으면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운이 없었다. 때로는 자신의 의지로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사람의 가는 길을 정하기도 한다. 신이든 신이 아니든 그것을 운이라고 말한다.
그의 빛나던 청춘은 그렇게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로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그 뒤 마을 분의 이야기로는 고시를 포기한 용의 알 같은 아들의 방황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참 아까운 사람이다. 학문을 공부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나마 자신의 사주에 맞았는데 그 기회를 버리고 말았다.
사주에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치 그렌져 승용차가 험한 돌산길을 달리는 꼴이었다.
인생은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 짧은 영광에 긴 시련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