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아 Aug 15. 2020

라면 이야기

길 잃고 울다가 먹은 라면 

면 요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인스턴트식품 자체가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면 라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이 없다. 어린 시절 희미한 기억 속에 유일하게 생각나는 라면은 S사의 라면뿐이다. 

그 뒤에 L사의 라면도 나오기는 했지만 70년대를 어린 시절로 보낸 나는 S사의 라면에 대한 추억뿐이다. 

그 시절에 주로 분식으로 먹던 국수는 그저 김치 국물에 비벼 먹거나 어쩌다가 멸치로 국물을 만들어 양념장에 김치나 김가루를 부셔 넣고 먹는 일이 전부였다. 멸치 육수 내기도 힘들어 김치 국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기도 했는데 시큼한 김치 국물 맛만 나고 그리 맛있지는 않았지만 밥에 질려 먹는 국수는 별미였다. 

어쩌다 라면을 먹으면 그야말로 입은 천국의 문을 넘나 든다. 기름진 고기 국물 맛 비슷하게 났다.-신발도 튀기면 맛있다고 하듯이- 튀긴 면발 고소함과 소고기 국물 맛을 내는 인공감미료가 첨가된 수프 맛은 자극적이고 유혹적이었다. 자꾸 먹어도 먹어도 질리질 않으니 말이다. 

지금은 흔하게 먹고 가장 저렴하게 먹는 국수 대용품이 되었지만 나의 코흘리개 시절에는 주말에 큰 마음먹고 끓여먹었던 식품이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전에는 커다란 물통 같은 양은솥에 하나 가득 끓였다.

양푼이에 하나 가득 김치를 놓고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 대며 식구들 모여 앉아 먹던 라면의 맛이 꿈결처럼 흘러간다.

그 시절은 춥고 배가 고픈 시절이다. 도시로 돈을 벌러 온 우리들의 아재와 아지매들의 허기지고 기름기 빠진 뱃속을 든든히 해주는 맛깔나고 요리하기 쉬운 음식이었다.


시절이 시절이니 집안에 식솔들이 꽤 있었다. 커다란 일본식 적산 가옥을 시대에 맞게 개조한 단독주택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주인집에 함께 살았다. 마치 군대의 병영을 연상하게 했다. 다들 같은 고향의 친척이나 이웃집 형과 동생 사이였다. 


초등학교 1 학년에 다니면서 글도 깨우치고 나는 나 스스로가 제법 컸다고 생각했다. 조금 영특했나? 

가끔 어머니는 나에게 소소한 잔 신부름을 시키시곤 하셨다. 걸어서 학교 갈 정도이니 가까운 시장이나 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집은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사실도 그러했다. 콩나물 신부름이나 아버지 담배 심부름도 하고 했으니 나 스스로 대견하게 여길만 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조금 과대평가를 하셨던 모양이다. 드물게 사건이 생기는 일이 있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해!


가정부가 있던 시절이었다. 조금 산다는 도시의 가정에서는 집 안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말로 식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집 안 살림을 도와주고 돈을 벌어 시골에 있는 부모님과 오빠 동생의 학업을 도우기도 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어린 나이에 삶으로 뛰어든 우리들의 여동생이고 누나였다. 

개발 독재 시절에 가난한 시골을 떠나 도시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일할 곳은 대부분 정해져 있다. 공장에 가거나 아니면 장사하는 곳에 점원이 되거나 혹은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간혹 나쁜 쪽으로 빠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시골에 계시는 부모 형제에게 돈을 보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대부분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도시로 일을 하러 왔기에 나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꼭 서울만이 아니라 부산과 대구 등지의 산업 단지가 들어 조성된 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았다. 장남이고 장손인 아버지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집 안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의 자제들은 아버지에게 자식을 의탁하였다. 명절이나 날이 달린 날 시골로 갔다 오시면 꼭 한 두 사람이 함께 따라오는 일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집에서 집 안 일을 도와주던 식모 누나들과 나하고는 나이가 거의 10년 정도 차이가 났다. 먼 친척이나 친척의 이웃들이었다. 한 마을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집 안 일을 도우는 누나들이 많았다. 

그러나 누나라 부르지 못하고 아지매라고 부른 이유는 다 촌수 때문이다. 어떨 때는 나보다 대 여섯 살 많은 누나를 아주머니라 부르면 내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부끄럽고 창피해 그렇다. 아주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돈을 벌러 왔으니 얼마나 외롭고 그리움이 가득했을까 그때 내가 그런 아지매들을 괴롭히고 귀찮게 했던 철없던 내가 가끔은 싫어진다. 

어머니는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온 아지매들을 잘 돌 봐주셨다. 가끔 저녁에 교복을 입고 나서는 아지매들도 눈에 띄기도 했다.(야간 학교를 다녔다)


대개는 일가친척이거나 한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소개로 오는 경우가 많아 외로운 타향살이 서로 의지가 되었다. 가끔 쉬는 날이나 집에 잔치가 있는 날은 한가한 집의 누나들이 집으로 건너와 도와주는 정도 있었다. 

일하던 아지매들은 거의 사춘기에 접어들 때쯤 집으로 온다. 한 집에 먹고 자며 일하는 또래의 아재들도 사춘기 소년 또래를 살짝 지나가는 나이다. 고등학교 이 삼 학년의 나이쯤이니 이성에 호기심은 대단하다. 

일하고 돈 벌고 시간은 흐르고 아재들은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할 나이가 된다. 

그리고 입대를 하고 제대를 하고 다시 일하던 집으로 돌아온다.  돈을 벌기 시작하고 이십 대 중반을 넘어가니 가정을 이룰 때가 된다. 그 시절 산업화는 개인은 찾을 수 없다. 공장과 일터에서 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쉬는 휴일이 쉬는 날의 전부였다. 쉬는 일요일 아재들과 아지매들은  숨어서 몰래 연예를 한다. 

데리고 있는 집의 어른들 눈을 피해 몰래 연예를 한다. 그러나 소문이 나거나 데이트하다가 어린 나에게 들키기도 한다. 남녀가 사귀는데 소문이 안 날까!

한마을 아니면 이웃 마을에서 서로 서로 소개로 일자리를 잡았으니 시골의 양가 집안이 모르는 사이는 아닐 터.

양가 집안 어른이 우리 집에서 모여 머리를 맞대고 혼사에 대해 상의하는 모습은 우리 집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때까지도 시골에서 올라온 어른들은 한복 마고자 차림에 모자를 쓰고 흰 옷이 누렇게 바랜 한복 치마 차림으로 오셔서 안방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양쪽 부모님 그리고 집안 어른 한 두 분이 앉아 계시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치 죄인처럼 머리는 숙이고 눈은 방바닥만 쳐다보는 아재와 아지매의 모습을 나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성공한 장손으로서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이었다. 

아버지는 혼사의 최종 결정자였다. 결국 커플은 시골로 가지 않을 것이고 여기서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야 한다. 살 집과 세간 결혼식장 뭐들 일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준비를 하신다. 물론 시골에서도 아들과 딸의 결혼을 위해 논밭 전지 팔고 할 수 있는 준비는 다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데리고 일을 시키는 죄로 그 젊은 청춘들의 새 길을 닦아 주는 혼사를 준비해야 했다. 

부부 싸움은 부부간의 문제보다는 사소한 일이나 일가친척 일로 다투는 일이 많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일가친척을 데리고 일을 시키는 죄로 가끔 다투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이 어린 내 눈에 그리 기분 좋지는 않은 일이다. 괜히 아재와 아지매가 미워지기도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집안 모임처럼 치러지던 혼사 일에 아버지 어머니의 다툼으로 해서 어린 나를 은근히 화나게  했다.

신혼여행은 결혼 당일 날 가까운 해운대나 유원지에서 하루를 놀고 장급 여관에서 신혼 밤을 치르는 게 전부였다. 지금 같은 신혼여행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삭월 셋방을 얻어 두 사람의 결혼 행진곡은 시작된다. 

이제 아지매를 책임질 남자가 생겼으니 집에서 일은 그만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렇게 혼사 문제로 다투셔도 새 출발 하는 아지매와 아재를 돌 봐주셨다. 뭐 친정이 가까이 있나 시집이 가까이 있나 그저 기댈 곳은 남편이 일하는 친척집뿐이다. 어머니는 특별한 음식이나 김치를 담그시고 나면 신혼집에 맛이라도 보라며 보내 주시고는 했다.  

어머니와 들어온 식모 누나는 갈 수 없다. 심심해서 몸이 근질 거리는 어린 나는 어머니의 호출을 받는다.

아재와 아지매가 사는 집을 기억하냐고 물어보시고 나는 당당히 안다고 말씀드린다.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는지 보고 싶었다. 언제 볼 거냐 하는 생각에  즐거운 기분으로 길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그릇을 보자기에 싸고 집을 나서니 그 근처까지는 신나게 찾지만 그 골목이 그 골목 같고 그 집에 그 집 같다. 그때부터 나는 울상이 되고 울상이 되어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아지매를 찾는 나는 드디어 울음을 터트린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아지매는 집 밖에서 서성거렸다. 

울며 보자기에 그릇을 들고 헤매고 있는 나를 보고 얼른 뛰어 온다. 찔찔 자면서 보자기에 싼 그릇 하나 들고 헤매는 내 모습이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보다. 나는 울고 있는데 웃는 아지매가 미워 고사리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했다. 그릇을 받아 들고 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울고 불고 하며 걸었으니 얼굴이 당연히 지저분하다. 얼룩진 얼굴에 아지매는 물에 수건을 적셔 닦아 준다. 

이제 이십 대 초반의 풋풋한 아지매의 손길에 울음을 그친다. 그러나 한 번에 그쳐지겠는가!

저녁 해가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 저녁을 먹으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한다.(요즘처럼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일에 따라 늦은 저녁을 먹기 일쑤였다)

울고 헤매고 했으니 배가 고프다. 가끔 간식이나 이른 저녁을 차려 주던 아지매가 

"배고프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지매는 찬장에 넣어 둔 라면 한 봉지와 작은 노란색 양은 냄비를 부엌에서 꺼내 들고 마당에 있는 석유곤로 앞에 선다. 물을 받아 석유곤로에 냄비를 얼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나는 침을 꿀꺽 삼기며 평상에 앉아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길을 잃고 헤맸던 생각은 벌써 멀찌감치 달아나고 없다. 

나는 다 끓여진 라면을 평상에 앉아 후루룩 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어린 소녀의 티가 가득했던 아지매는 결혼을 했고 성숙한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잠시 헤매었지만 심부름을 무사히 마치고 언제 눈물을 흘렸나 싶게 웃으며 라면을 먹었다. 

집으로 데려다주는 아지매의 곱고 하얀 손을 쥐고 걸었다. 

라면의 맛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나 아지매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끓여 주었던 라면!

어머니 밑에서 살림을 배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그리고 아지매와 아재는 떠났다. 

아버지에게서 일을 배우고 나니 가정이 생기고 자립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독립을 했다. 그때 공업 도시로 성장하던 울산으로 떠났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안고. 

물론 아버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 도우시기로 했지만 그래도 십 년 가까이 정이 들었던 우리는 나도 울고 아지매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모두 울었다. 가까운 곳이지만 한 번 가면 쉽게 오기가 힘들었다. 지금처럼 차가 집집마다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갑자기 출출해 라면을 끓인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쳐다보며 그때 그 아지매 얼굴이 둥그런 냄비의 모습과 겹쳐져 보인다. 그리고 빙그레 웃음 짓는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리는데 음식만 한 게 없다. 

지금의 라면보다 맛은 덜하지만 지금 라면에는 없는 감미료가 있다. 바로 정과 그리움이라는 감미료다.

그 맛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히고 사라졌다. 

몇 년 전 친척 결혼식에서 몇십 년 만에 만났다. 나 보다 그 두 사람이 나를 더 반가워했다. 

그때의 청순하고 이쁘고 잘생긴 얼굴들은 모두 사라지고 주름진 얼굴만이 남았다. 

그때 청춘의 모습들은 없지만 그들의 행복한 얼굴에 나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아지매는 내 손을 한동안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비온 뒤 두둥실 떠 있는 구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