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굴러 다니다 이제 나타났지!

몽당연필

by 마리아

연필을 썼다.

긴 연필심이 닳아 없어지면 작은 칼로 연필을 깎는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니 긴 연필이 어느새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로 작아졌다. 손에 익은 연필에게 무슨 미련이 있는지, 연필도 나를 떠나기 싫은지 새끼손가락보다 더 짧아진 몽당연필을 버리기 아까워 책상 위에 그냥 두었더니 이리 굴러 다니고 저리 굴러 다닌다. 애물단지가 따로 없다. 연필심은 닳아 버리고 군데군데 상처가 나 보기 흉하다.

못쓰는 볼펜 대를 달아보았다. 아슬하게 손과 볼펜대에서 곡예를 부린다.

종이에 끄적거려 본다. 연필로써 힘이 다하였는지 흰 종이에 글이 힘이 없다.


너무 작아진 탓일까 힘을 주니 볼펜대와 연필이 사이가 좋지 않은지 서로를 밀어 댄다. 어쩔 수 없다.

연필이 낙담을 한다. 내 마음이 연필이다. 나도 낡고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하다.

글씨가 힘이 없고 잘 씌지 않는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분홍색 플라스틱 연필통 끝부분이 까맣게 변했다. 연필심과 부딪히면서 흑연 가루가 묻었다. 열어 보니 작은 몽당연필이 몇 개 들어 있다. 버리지 못해 모아 둔 연필이다. 이제 한 개를 더 집어넣는다. 그렇게 몽당연필은 책상 서랍 한 귀퉁이로 밀려나 잊힌다.


긴 자태를 뽐내던 연필은 줄고 줄어 이제 손아귀에 쥐기도 벅차다. 마치 사람의 인생처럼 빛나던 자태를 뽐내고 서서히 쪼그라들어 작아지고 손에 잡기도 힘든 모습이 나이 먹어 가며 늙어가는 사람과 닮았다.

아직 연필 심이 드러나지 않은 긴 연필은 이제 사람의 손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검은 흑연 심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고 느낌을 흰 종이에 쏟아 내게 한다. 그렇게 연필은 사람의 인생처럼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에 맞게 최선을 다하고 이제 작디 작아진 몽당연필이 되어 어느 순간 사라진다.

서랍에 들어간 몽당연필은 더 이상 사람의 손길로부터 멀어진다. 아니 잊힌다.

연필은 나와 더불어 사람들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을까!

작은 몽당연필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서랍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몽당연필 중 그래도 조금 긴 연필을 찾아보았다. 연필 머리를 칼로 깨끗이 정리하고 깨끗이 다듬어진 연필 머리는 긴 볼펜 막대를 쓰고 새롭게 탄생한다. 초로의 나에 접어든 내 모습 연필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나는 연필을 보고 쓰디쓴 웃음을 짓는다. 어쩐지 연필도 나를 보고 쓴웃음을 짓는 듯하다.

그렇게 책상에 굴러 다니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던 몽당연필이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연필의 일생을 불 사르고 사라진다.

필통 안에 보이는 작은 몽당연필!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연필 모습이 삶과 겹쳐 보인다.

길고 아직 깎기지 않은 연필은 그 모양만으로 새롭다. 얼른 연필을 깎아 써 보고 싶다. 그렇게 사랑을 가득 받던 어느 날 짧아진 연필은 소리 없이 서랍 속으로, 혹의 책상 한쪽 구석으로, 아니면 쓰레기 통으로 내 팽개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의 모습은 이제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떠질 듯 탐스럽다.

긴 연필처럼 젊고 혈기 왕성한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드는 연필처럼 늙고 노쇠해지고 이제 손에 쥐기도 힘든 연필처럼 사람도 늙고 힘이 빠져 가고 결국은 연필통에 들어가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 연필처럼 인간도 쪼그라들어 종래에는 연필통의 연필같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고 만다.

서랍의 구석진 곳에 필통을 넣고 몽당연필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서랍을 닫는다.


책상에 아무렇게 나 굴러 다니는 필기구가 많다. 요즘은 연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볼펜이나 사프를 쓴다. 그러나 글씨를 예쁘게 쓰는데 연필만큼 좋은 필기구는 없다.

글을 쓰거나 메모를 할 때도 연필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나도 연필을 쓴다. 샤프가 있기는 해도 왜 그런지 연필에 정이 더 간다.

칼로 예쁘게 깎아 흑연 심을 보기 좋게 다듬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막힌 아이디어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여전히 연필을 쓴다. 잘못 쓰면 지우개로 지워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맞춤법이나 글자를 정확히 쓰지 못해서 연필을 쓸 것이다. 아이들은 새 연필을 소중히 다룬다.

시간이 지나고 연필은 볼품없지 작아지면 필통에서 사라지고 새 연필이 자리를 찾아 한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던 몽당연필은 버림받는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간다.

버려진 연필들은 슬퍼할 것이다.

처음 화려함과 사랑을 받던 연필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지면 연필은 슬프다.

사람도 나이를 먹고 더 이상 찾아 주는 이 없을 때 얼마나 외롭고 슬플까

다시 서랍을 열어 본다.

짧은 연필이지만 그중에 조금 긴 연필을 손에 쥐고 연필 끝을 조금 깎아 뒤에 쓰다 버리려는 볼펜대를 꽂아 본다.

음~

손에 쥐어지지만 뭔가 어색하고 불안하다.

그래도 작은 메모지 옆에 놓는다. 연필이 갑자기 환하게 웃는 듯하다.

내 마음도 환한 빛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기분이다.

작은 몽당연필이 나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듯하다.

나도 작아진 몽당연필을 한 번 힘주어 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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