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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May 04. 2021

라면 이야기

라면의 유혹

창 밖에는 을씨년스럽고 휑한 바람이 불어오고 추워진 바깥 날씨 탓에 전기장판을 깔고 앉아 교자상을 책상 삼아 등받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는다. 

검게 드리워지고 깊은 어둠만이 사방을 뒤덮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짙어가는 어둠의 시간 속에 이 반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책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 

바깥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얇은 서리를 만든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홀로 된 주인공 이반의 마음에 몰입하는 순간

'꼬르륵꼬르륵'

살아 있음을 느끼는 배고픈, 어쩔 수 없는 삶의 본능적 욕구가 용수철이 되어 나온다. 

자정을 알리는 낡은 태엽 시계 12번의 종소리가 힘겹게 넘어간다. 

모두가 잠든 어둠의 장막이 두꺼워지는  이 시간에 도둑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조심스레 몸을  움츠리고 몰래 부엌에 가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찬장 문을 열지만 삐거덕 하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며 열린다. 

작은 양은 냄비를 손에 쥐고 싱크대 수도에 물을 튼다. 바깥 날씨와 어우러져 폭우가 내리는 소리다. 

캄캄한 어둠 속 손을 더듬어 가스 불을 켰다. 파란 가스 불빛이 에메랄드 보석되어 눈을 희롱한다. 어둠과 차갑게 빛나는 푸른빛이 서늘하다.

바람 불고 깊게 어둠이 깔리고 달도 별도 사라지고 기어코 겨울비가 내린다. 바스락 하는 라면 봉지 소리가 세차게 내리는 겨울비에 묻혀 둔감해진다.

보글보글 끊는 냄비 속으로 꼬부라진 라면과 수프를 넣는다. 냉장고 안을 열어 보니 저녁 하며 썰어 넣고 남은 파가 작은 종지에 그릇에 랩으로 싸여 있고 누런 달걀들이 선잠에 깨어난 듯 게슴츠레 나를 본다. 

대학 시절 친구가 수련의 시절에 환자 본다고 얼굴도 못 볼 때 친구를 위로한다고 병원 응급실 앞에 간 일이 있다. 응급실 앞에서 만난 친구의 몰골은 가운만 입었지 후줄근한 모습이 딱해 보였다. 겨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끼고 공부하는 나는 왕자였다. 허여멀건한 얼굴빛에 헝클어진 머리로 보아 과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이 되었다. 

라면을 사달란다. 역시 늦은 밤 야식은 라면이다. 

병원 응급실 입구 앞 작은 포장마차에 가서 우정을 나누며 먹었던 그때 그 라면 맛이 난다. 그냥 파는 라면이었지만 맛이 조금 달랐다. 라면에 손으로 다진 마늘을 조금 넣었다고 한다. 맛있었다. 

젊은 날의 우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겨우 차 숟가락 반 정도 넣은 마늘 때문인지는 몰라도 맛있었다. 그 생각이 나서  다진 마늘 통도 꺼내 놓았다. 

물이 끓기 시작한다. 늦은 밤의 근사하고 푸짐한 야식은 아니지만 라면이면 어떠하리 맛있으면 그만이다. 

김치 국물과 김치를 조금 넣었다. 많이 익숙한 냄새가 난다. 작은 티 스푼 하나를 꺼내 들고 다진 마늘통을 열고 반티 스푼을 떠서 끓는 라면 국물에 푹!

다진 마늘의 냄새와 섞인 라면에 김치와 김치 국물을 조금 넣고 나니 김치찌개 냄새처럼 강한 향이 코를 벌름거리게 만든다. 신 김치의 향 때문에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면발이 거의 익어 간다. 젓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면발을 느낄 수 있다. 어느 날은 좀 꼬들꼬들하게, 또 어느 날은 약간 퍼진 듯한 면발이 사람 마음처럼 변덕을 부린다. 

오늘은 꼬들한 면이 먹고 싶다. 

통에 있는 파를 넣는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집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찌그러진 얼굴을 할게 눈 앞에 선하다. 그래도 일단 먹자. 

계란도 "탁"소리 내며 냄비 안으로 빨려 들듯 들어간다. 비릿한 계란 냄새가 흰 연기 속으로 자취를 감출 때쯤 너무 익은 계란이 싫어 살짝 계란을 풀어헤쳐 놓고 불을 끊다. 양은 냄비가 온몸으로 받은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맹렬하다. 

그 기운에 달걀이 익는다. 

고춧가루 잔뜩 묻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얀 순백의 시원한 백김치를 끄집어낸다. 그 옆에 파릇한 열무 물김치도 함께 낸다. 

깊은 밤 술 한 잔이 빠질 수 없다. 

소주가 재격이다. 찬장 문을 열어 보니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듯 반쯤 남긴 소주병이 눈에 들어온다. 

물 잔을 들고 그냥 확 따른다. 표면 장력이 생길 정도로 찰랑찰랑한 잔을 조심스럽게 식탁에 올리고 

양은 냄비체 올린다. 뚜껑을 열고 마치 신비의 동굴에서 퍼져 나오는 흰 연기처럼 훅 퍼지는 연기에 달아나는 냄새를 코로 잡는다. 

손바닥을 비비며 젓가락을 쥐다 말고 찰랑거리는 물컵을 손에 쥐고 단숨에 반잔을 마신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짜릿한 맛이 배까지 도달하면 뜨듯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겨울바람 소리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화끈 달아오른다. 

자 이제 먹기 시작한다.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김 모락 나는 면을 후후 불어 입에 쏙!

기름에 튀긴 면 맛이 고소하다. 술맛에 쓴 입안이 달다. 

작은 백김치 조각 연이어 열무김치 조각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김치가 입안에  터지면서 터지면서 나오는 시원 액체가 느끼한 입을 개운하게 한다. 

어느새 라면은 바닥을 보이고 아쉽다. 

먹고 후회가 밀려 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 좋다는 말이 왜 있겠는가!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걸로 하는 방송 멘트가 생각난다. 그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야식은 무죄다. 

번질 거리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비비 람이라는 놈 때문에 춤바람 난 아로니아 줄기 아줌마를 바라본다. 신들린 듯 춤을 춘다. 빨간 구두를 신고 멈출 수 없는 춤을 추는 소녀 같이.

따듯해진 배를 부여잡고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가한 이내 몸은 언제나 파란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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