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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Jun 18. 2021

남자의 갱년기

장마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흐리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하는 날이 며칠 이어지고 있다. 

날씨 탓인가 자꾸 마음도 가라앉고 모든 일이 귀찮다. 현관문을 열는 순간 조금 앞에 뱀이 한 마리 꿈틀거리며 지나간다. 옆에 있던 집 사람이 기겁을 하며 호들갑을 떠는데 그 모습도 꼴이 보기 싫다. 

산골 마당에 기어 다니는 뱀이 독한 놈이 없다. 문 열리는 소리에 꿈틀꿈틀 도망가는 놈이 뭐 그리 무섭다고 호들갑을 더니 말이다. 처음 보는 뱀도 아니고 가끔 보면서도 부지깽이 들고 나와 땅을 때리는 모습이 희극 배우 뺨칠 정도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보기 싫다. 

흐리고 축축한 날씨에 마당과 텃밭에 풀 뽑는 일을 제외하고 할 일이 없다.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의자에 기대어 책을 보았다.  

십 대 이십 대에는 학교를 다녔으니 책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당연히 학생이니 책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삼십 대 사십 대에는 산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책은 손에서 놓기 싫었다. 한 달에 한 두 권은 꼭꼭 읽었지만 오십이 중반을 넘어가고 나니 어디 갈 일도 크게 없고 도시를 떠나 시골 생활에 적응하니 도시로 가서 객쩍게 친구 만날 일도 없다. 점점 생활이 줄어들고 몸을 움직이고 누구를 만나는 일보다는 조용히 자연 속에서 책을 벗 삼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 한 가지 욕심이 생긴다. 나도 책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마음 생긴다. 글을 쓰는 일도 어려운데 책을 내보겠다는 욕망이 과하기는 하지만 글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따라온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마음이 바뀌는데 어찌 책을 읽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 게임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번은 스마트 폰에 농장 꾸미는 게임이 있어해 봤는데 논아을 키우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시간도 잘 갔다. 너무 빠져 드는 듯해서 앱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근처도 가지 않았다. 

책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게임보다는 더 빠져 들 수 있다. 허구의 세계라고 하지만 전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고 그 속에 몰입하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면 요동치는 변덕스러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렇다고 함께 사는 여자와 다툼이 없지도 않다. 

책 보는 일 빠지고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밥 먹고 내가 만들어 놓은 책 보는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여자가 투덜거린다. 나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기분 나쁘다. 전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도 괜히 짜증이 난다.

펜데믹 이전에도 산골에 사람과 꼭 필요한 만남 외에는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함께 사는 여자도 사람 만나는 일을 어려워하건만 좀이 쑤시는 모양이다. 할 일도 별로 없는데 마당과 텃밭 돌아다니고 나에게 이곳 저것 잔 심부름을 시킨다. 

어떨 때는 얄미워 대답도 하기 싫다.  풀 좀 깎으라 하는데 하지 않고 계속 미루고 있다. 

심란하고 우울한 마음 때문인지 아내가 그렇게 밉상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때로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마음이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한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어떤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다가 공연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생겨 얼굴이 벌겋게 변하기도 한다. 

그런 아내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넘긴다. 전 같았으면 손톱 세우고 덤빌 일을 그냥 참아 넘기니 신기한 일이다. 나보고 갱년기라고 놀린다. 

"에이 남자가 무슨 갱년기가 있어? 여자가 갱년기 지?"

눈을 동그랗게 치켜 세운 아내가 

"아이고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남자도 갱년기가 있데 여자는 남자처럼 되고 남자는 아이처럼 응석받이가 되는 나이가 오십 대쯤에 생긴데 그것 여자의 갱년기와 같다고 하네."

아내의 말에 입을 비쭉거렸지만 맞는 말이다. 갱년기인지 뭔지는 몰라도 예전 같이 않다. 마음도 조급하고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에 짜증이 난다. 

뭐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 중년을 지나 초로에 접어들면 오춘기가 온다더니 바로 내가 그 꼴이다 싶네.


살아온 날들이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후회가 갑자기 분노로 변한다. 나를 변명하고 남을 원망하고 미운 감정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갱년기라고 하는 말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변명하고 싶어 생긴 말인지도 모른다. 

회한이 남으니 그렇다고 생각한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자꾸 그 일을 생각한다고 되돌릴 수 없다. 그저 마음 좋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갱년기가 오래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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