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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Jul 07. 2021

사주 이야기

사주 공부는 왜 하나?

살다 보니 중하나 쯤 알고 있으니 가끔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피신처로는 아주 안성맞춤이다. 

경북과 충북 강원도 삼도의 경계쯤 되는 어느 곳에 자신의 작은 암자?를 가지고 있었다. 암자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스님들이 잘 쓰는 말로 토굴쯤이라고 말해 둔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는 알맞은 키였지만 너무 말라 왜소해 보였다. 짱구 머리라 맨숭맨숭한 머리가 그리 흉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이도 나보다 한 열두 살 많았다. 띠 동갑이다. 무엇보다도 한적한 산골에 작은 암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럽다고 말할 정도의 초라한 토굴에 앉아 겨우 시주 들어온 쌀과 푸성귀로 연명하는 스님이다.

대학 시절 답사를 갔다가 다리도 아프고 쉴 곳을 찾다 보니 영주 소백산 자락을 헤매고 다니다가 들렀다. 

삐쩍 마른 몸매에 다 헤어진 승복을 여기저기 기워 입고 고무신짝 하나 걸치고 공양주 하나 없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스님과 인연을 맺고 가끔 세상이 나를 짓누르고 숨조차 쉬기 힘들다 싶으며 쪼르르 달려갔다. 

법당에서 절도하지 않고 한 이틀 지내다 훌쩍 떠났다. 스님은 늘 웃으며 

"밥이나 먹고 가!"

라는 말이 전부였다. 

곡차를 좋아하시니 밤새 차를 나누다 스러지 듯 자고 일어나 라면으로 해장하는 시간이 그래도 즐거웠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녀오고 나면 다시 삶을 사는 충전이 되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스님이 살짝 쌀짝 사주나 주역을 가르쳤지만 나는 그것을 배운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중국 제나라 군주였던 강 태공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오랜 시간 자기가 모실 주군을 기다리며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문왕이 뭘 낚소 하고 물으니 세월을 낚고 있소 했고 그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문왕은 그리 등용했다. 

태공망의 이야기는 이외에도 도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는 학문과 병서를 읽으면 훗날을 대비했다. 그는 주역을 공부했다. 강태공이라 불리던 태공망은 자연을 공부하며 자연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었다. 

사주 공부는 자연을 읽는 학문이다. 하루의 일기를 관찰하고 한 달을 관찰하고 계절을 관찰하는 학문이다. 

우주의 기본 구성을 수, 화, 목, 금, 토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물질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요즘은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산다) 인간도 자연의 변화에 따른다고 보았다. 

강태공도 그런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학문이다. 강태공이라 불리던 태공망의 공부는 인간학이었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 관한 주역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지혜를 깨쳤다. 그리고 자신의 때를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 문왕과 만나는 곳을 정확히 알았고 그곳에 나가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학문이 높다는 소문을 들은 문왕은 그를 자신의 책사로 삼아 천하를 도모하려 했다. 어느 날 길을 나서 호수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대나무 낚싯대를 던지고 마냥 세월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행차를 멈추고 그 노인의 옆에 다가갔다. 

그 유명한 대화가 시작된다. 


사주와 주역은 자신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려 주는 학문이다. 

물러서 실력을 기를 때와 앞으로 나서서 움직일 때라는 자신의 사주에 운과 연결이 된다. 

인생의 즐거움 성냄 사랑 기쁨이 교차하며 가는 긴 여정이다. 그 여정 이 늘 비단길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바람 치고 폭풍을 만난다. 

이 공부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한는가를 잘 알려 주는 학문이다. 겸손이 왜 필요하며 욕심을 왜 버리고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 학문에 들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이치를 알기 위해 여러 공부를 했다. 부처는 자신 안에서 자기의 모든 번민을 끊어 내기 위해 자기 견성의 공부를 했다. 

예수는 세상의 모든 피박과 억압에서 해방된 자유와 존엄을 외쳤다. 그는 신을 토한 구원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스스로 억압받는 존재가 아닌 사랑받는 존재이며 사람 위에 사람 없는 평등을 부르짖으며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갈 길과 나갈 때를 알았다. 죽음에 초연했고 삶의 업에 대한 고리를 끊었다. 

그들을 그래서 성인이라 이야기한다. 

그들처럼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나가고 들어가는 문제를 모른다. 

주역과 사주 명리학은 자기 성찰의 학문이다. 나의 그릇을 알고 자신의 그릇에 맞게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다. 그것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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