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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Oct 06. 2022

부자가 되고 싶다?

 세월이 변한 탓인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판단하는 지렛대가 바뀌었다. 

사람의 능력과 인간 됨됨이 그리고 잠재력이 있는 가능성을 보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겉모습과 가진 재물로만 판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던 시대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그 사람의 부와 지위 그리고 학벌이 그 사람의 인격이며 능력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봉건적 신분제 사회가 부활한 모습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돈이 없으면 천대받고 아무리 아는 게 없고 세상의 이치를 몰라도 돈만 있으면 권력을 포함한 모든 것을 움켜쥐는 천박한 세상이 되었다. 

재물이나 물질의 힘이 사람을 지배할 수 있고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알고 난 뒤 사람들은 재물을 더 탐하고 욕심을 낸다. 

남이 가진 물질을 탐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나라 간에는 전쟁을 일으켜 그 나라가 가진 소중한 자원을 빼앗는다. 

모두 자신보다, 자기 집단보다 많이 가졌고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고 싶은 이유 때문이다. 

세계사에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살인은 탐욕과 질투 때문에 일어나고  전쟁도 역시 다른 나라보다 내 나라가 더 가져야 한다는 탐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물질과 힘으로 누르고 지배하고 싶은 인간의 사악한 욕망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땅과 재물과 자원을 탐하려고 일으키는 침략전쟁이지만, 영국의 위대한 문호 셰익스피어를 가지려고, 버지니아 울프를 손에 쥐려고, 찰스 디킨슨을 차지하려고 영국을 공격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렇듯이 위대한 문호 괴테를 차지하려고 독일을 공격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정신이 주는 재산은 그저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그것 때문에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의 지식을 빼앗으려고 상대를 죽이는 일도 없지 않은가!

갑자기 나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너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내 목이 달아날 때까지 온전히 너의 것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머릿속을 채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 

손에 쥐고 보이는 물질은 빼앗기고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에 있는 지식과 지혜는 아직 그대로 있고 앞으로도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어디로 달아나지 않는 재산이다.

그런 정신의 재산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상대의 머리에 있는 게 뭐가 들어 있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고 관심도 없다.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도 머리를 써야 지식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한 사람들은 그저 밖으로 비치는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안경을 쓰고 어떤 시계를 차고 어떤 차를 타고 있는지는 관심이 아주 많다. 

웃긴다.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고 때로는 질투와 시기로 때로는 경멸의 눈빛을 던진다. 

자신보다 못 입고 걸친 것 중에 명품 하나 제대로 없으면 그 길로 무시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식당을 가도, 백화점을 가도....

그 사람의 교양, 인격, 지식과 생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상대를 바라보는 전부인양 사람을 보고 평가한다.

씁쓸한 일이다. 진정한 인격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느니 말이다. 

말을 하는데 옆으로 살짝 갔다.  

물질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은 인간이 가진 큰 욕망 중에 하나다.

풍요롭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러나 그 풍요의 기준이 뭘까?

잘 살고 싶다고 말하는 대부분에게 물었다. 얼마만큼의 재산이 있으면 잘 사는 것이냐고. 

대답은 천차만별이다. 

좋은 차, 넓은 집, 좋은 옷을 가지고 아이들 넉넉하게 교육시킬 수 있는 돈이 있으면 만족한다고 한다. 

그러나 50평 집에 사는 사람은 6,70평짜리 집에서 살고 싶어 한다. 

5천만 원이 넘어가는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1억짜리 멋진 외제차를 타고 싶어 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고무풍선 같다. 불어도 불어도 더 크게 만들고 싶은 풍선처럼 그리고 그 풍선이 터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

사주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질문!

"제 사주에는 돈은 많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사주를 열심히 보고 하는 나의 말은 

"없습니다."

전부 눈이 동그레 지고 한순간 당황하는 빛이 그대로 얼굴에 비친다. 입을 '쩝' 다시고는 비웃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무슨 소리하냐고 묻는다.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죽으면 돈 다 두고 가니 한 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말하면 그 때야

"에이 선생님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죽으면 돈 다 들고 가지 못하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십니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의 손목에는 이름 대면 다 알만한 번쩍거리는 시계를 두르고 있고 얼굴은 번지르르한 개기름이 흐르고 마당에 새워 둔 차는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은 족히 되는 차를 세워 놓고 거만스럽게 앉아 상담하고 있다.

"뭐 새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데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주를 보고 주역 점을 쳐 본다. 사주에 그의 用神(용신이라 하여 사주의 태어난 날의 오행에 영향을 주는 오행이다) 내리막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지금부터는 벌려고 하지 말고 지키려고 하세요."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심지어는 뭐 이런 사주쟁이 봤냐는 불쾌한 표정도 얼굴에 그려지고 있다. 

돈, 재물!

이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미소가 듯하는 바가 궁금해 웃으며 다시 묻는다.

"재물복이 없나요?"

다시 되묻는다. 

"얼마나 있으면 재물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그 질문 앞에 사람들은 망설인다. 그리고 구체적인 액수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웃으며 말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고 다시 반문한다. 

부자가 되고 싶지만 구체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많으면 많을수록이라는 말은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절제와 검약의 미덕은 없다.

욕심 없는 사람은 없다. 

돈이 많은 부자로 살고 싶다. 

그렇지만 다 자기가 가진 각자의 그릇이 있다. 커다란 양동이를 가진 사람이 졸졸 흐르는 물에 양동이를 받쳐 놓고 있으면 어느 세월에 양동이를 다 채울 수 있을까! 

작은 사발 그릇을 들고 물줄기 세 찬 폭포수 앞에 가져다 대고 있으면 그 세 찬 물줄기에 그릇마저 깨진다. 

각자의 그릇에 맞는 삶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주는 그것을 알려 준다. 

'나는 그런 사주를 믿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잘 살 수 있다!' 

그래!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뜻을 이룬다는 사람도 있고 본 적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에게 한 가지 던져 놓은 덧이 있다. 

바로 욕심이다. 

욕망이라고도 하지만 악마는 그 덧을 쳐 놓았다. 그 덧을 모르고 계속 걸어가다가 걸리면 때는 늦는다. 

욕심이나 욕망은 자신을 그릇 친다. 어떻게 할까? 그리고 어떻게 그 일을 알 수 있을까?

학교 동창 중에 변호사가 있다. 별 볼 일 없는 내게 그 친구는 가끔 점심이나 술을 한 잔씩 사주는 고마운 친구다. 

어느 날인가 술 한 잔에 사람의 욕망을 이야기하면서 친구의 선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욕심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잘 말해 주는 이야기였다.


친구의 선배는 잘 나가는 판사 출신 변호사였다. 

판사 옷을 벗고 돈을 벌기 위해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동안 잘 닦아 놓은 인맥을 통해 많은 사건과 돈 되는 굵직한 사건을 몰아 받고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한다. 

그렇게 돈이 잘 벌리고 생활에도 큰 풍파가 없으니 그 변호사의 삶은 자신 만만했다. 

완벽했고 더 바랄 게 없었다. 

다만 자식들이 법조계로 가진 않아 아쉬웠다. 

순탄한 자신의 삶은 달콤했다. 어느 날 친구의 선배가 다른 두 사람과 힘께 재미로 신년 운세를 보러 갔었던 모양이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학관이나 점집을 찾는 남자가 많다. 세상 일이 그만큼 어렵고 힘든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친구의 선배 변호사는 현재 삶이 자신만만했다. 

오만한 기분으로 사주쟁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시험해 보았다. 

과연 현재와 과거의 상태를 놀랄 정도로 잘 맞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다. 

사주팔자가 궁핍한 팔자니 항상 돈이 나 가는 일에 조심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는 웃었다.  

'궁핍한 팔자라니!'

궁핍한 팔자라는 사실에 그 변호사는 수긍이 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어떻게 궁핍한 팔자라는 거지!' 

자식들은 그래도 회사생활도 하고 학교 선생도 하고 나름 안정된 생활을 하는데 내가 어디 돈 들어갈 데가 없는 생활에 무슨 엉뚱한 소린가 싶었다.

궁핍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아니 꽤 많은 재산을 모았고 앞으로도 인생에 큰 파도는 없을 것 같은데 저 사주쟁이가 사주를 잘 못 보는 사람이구만 하고 생각하고는 잊고 있었다.

그러나 왠 걸!

인간 욕심은 돈을 그 자리에 놔두지 않는다. 돈은 눈이 달렸다고 하던가!

가장 가까운 자신의 처남, 믿을 만하고 잘 사는 돈 많은 처가의 장남이었다. 

물려받은 사업체를 잘 꾸려 가던 처남은 사업 크기를 키우고 빚을 내면서 그럴듯하고 꽤 규모 있는 회사로 만들었다. 

사업이란 언제 어떤 위기의 순간이 올지 모르니 항상 대비해야 하는데 그 변호사의 처남은 주변의 우려에도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하며 재미를 보고 있었다. 

사실 겉모습은 그럴듯한 회사였지만 경쟁이 심했고 회사의 위기에 대비할 자금을 부동산 같은 고정자산에 묻는 바람에 급한 일이 생기면 돈을 끌어 쓰기 힘든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사업을 자꾸 확장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변호사는 처남이 잘 되어 가는 모습에 그만 자신도 욕심이 생겨 처남 사업에 투자를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건설 시공과 시행에 실패를 하고 주식에 투자했던 돈마저도 날렸다. 

회복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을 맞이 했다. 그 변호사의 아내는 남편 보기 민망했다. 그러면 뭐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든 재산을 잃고 그 어마어마한 큰 평수의 아파트는 작은 전세 집으로 쪼그라들었고 변호사 사무실 일은 이제 벌만큼 벌었다는 주위 사람들의 생각에 더 이상 돈이 되는 송사는 소개받지 못했다. 

재산과 일은 없지만 삶은 지속되어야 했다. 월급 받는 자식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무장이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의 도장 대표가 되었다. 

도장 값으로 얼마 정도 월급을 받고, 사건 재판에도 나갔다. 

기사까지 딸린 자동차 대신에 흔들거리는 버스 타고 다니는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

그 선배의 처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아마 자신도 부끄러워 주변에 쉬쉬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마음 여린 친구가 그래도 학생 때는 친하게 지냈던 선배님이니 가끔 저녁 식사에 불러 자리를 마련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마음이 괴로우니 술을 많이 마셨고 취하며 술주정처럼 늘 하는 말이 있었다. 

"너무 정상을 보지 마라. 7부 능선 8부 능선일 때 멈추는 용기가 필요해. 악마의 달콤한 유혹은 늘 옆에서 맴돈다. 그 욕심과 자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라는 말을 하며 눈가를 훔쳐냈다고 한다. 

사주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일어날 수 있는 일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살면서 생각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돈과 재물 권력이라는 유혹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변호사는 놀부전에 나오는 놀부와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놀부는 흥부보다 더 지혜롭고 열심히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의 욕망이 그를 삼켜 버리고 만 것이다.

친구의 선배가 그때 말하던 역술가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고 말했다. 

뭐 꼭 역술가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생은 정점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필요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생각해 본다. 

세상을 아직 많이 살아 보지는 않았지만 '박수받을 때 떠나라.' 하는 말도 있듯 늘 햇빛 찬란한 날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그릇이 있다. 그 그릇의 크기도 있다. 

그러하듯이 부정하기도 하는 자신의 그릇(작든 크든)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만 조금만 더 하자라는 욕심이 자신을 엄청난 구렁텅이로 빠트린다. 

어쩌면 사주 공부는 자신을 다스리는 공부 일 수 있다. 그 긴 세월 천덕꾸러기 같은 학문이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동안 친구와 연락도 소원해졌다. 그 친구는 법을 공부했고 배운 공부로 밥을 먹고 산다. 

그리고 주어진 몫만으로 산다. 욕심도 내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좋아하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을 것이다. 

법과 사주 명리학은 아주 가깝다고 말한다. 늘 선택의 순간에 서 있기 때문에다. 

그럴 것이다. 사주팔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하다. 

인생은 앞만 보고 너무 달려도 안된다. 때로는 인간다움의 가치는 물질과 명예에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부터 부유하게 사는 게 물질만 풍요롭다는 생각을 버리자.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무형의 가치와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고 산다면 조금 부족한 물질을 채울 수 있는 넉넉함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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