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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Feb 15. 2022

라면 이야기

해변에서 먹은 라면 이야기 1

집에서 먹는 라면과 야외에서 먹는 라면의 맛은 같은 인스턴트 라면이지만 그 맛과 입에서 느끼는 질감이 다다르다. 

또 야외에서 먹는 라면도 어디에서 먹냐에 따라 맛은 완전히 다르다. 

산에서 먹는 라면, 해변에서 먹는 라면, 학교 운동장에서 공차다 먹는 라면, 그리고 바다낚시를 나가서 먹는 라면의 맛이 제각기 다르다. 

그런 야외에서 먹는 라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부산이 고향이라 그런지 산도 좋지만 바다에 대한 애정이 있다. 

어릴 적 사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거리에 다대포와 송도라는 두 해수욕장이 있었다. 

어린 시절 70년 대 초에는 부모님을 따라 바닷가에 갔다. 그러나 슬슬 머리가 커지면서 친구들끼리 간 크게 버스를 타고 야구한답시고 모래사장이 넓은 바닷가에 간다. 

한 여름을 빼고 나면 인적도 거의 드문 한적한 어촌마을 같은 다대포는 우리가 자주 찾던 해변이다. (70년대 후반만 해도 아직 도시가 지금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넓은 모래사장과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커서 해 질 녘에는 발바닥에서 발등을 덮는 바닷물을 따라 갯벌에서 놀던 생각이 난다. 여울처럼 다가오는 파도가 얕아진 해변을 긴 뻘로 만들었다. 

발등을 간지르는 파도가 밀려온다. 기분 좋은 느낌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그 자체가 마음을 맑게 만든다. 

봄이나 가을의 햇살에 새까맣게 탄 악동들은 빈약한 용돈이나마 조금씩 나누어 라면을 사고 등산용 버너를 형이나 삼촌 몰래 가져왔다. 가장 가까이 사는 급우가 커다란 양은 냄비를 가지고 와서 해변가 끝에 있는 횟집을 하는 몇 안 되는 집 중에 가장 만만한 집을 골라 물을 얻는다. 물론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타깃은 여고생 누나들이다. 약한 곳을 찌른다고 봐야지! 

일요일이라고 그래도 해변에 와서 식사를 하는 관광객이 있다. 바쁜 일손을 거들어 주는 착한 누나들이다.

어릴 때는 나이가 몇 살 많은 이성에게 호감이 간다. 

두세 살 많은 누나들에게 연정을 느꼈던 것일까? 가위 바위 보에서 진 친구가 가까이 가서 물을 얻어온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누나에게 말도 못 붙이고 얼굴말 빨개져 냄비만 들고 있다. 

꼴이 우습다. 그제야 누나는 힐끗 쳐다보고 냄비를 빼앗듯 가져간다. 

뻘쯤이 서 있는 모습을 친구들이 멀리서 보고 키득거린다.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가게에서 나온 누나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냄비를 건네면서 미소 지어준다. 

천사가 따로 없다.

홍당무가 된 나는 누나의 눈길을 피하며 라면 끓일 물을 얻어온다. 

석양에 붉게 물들어 가는 지편선을 보면서 라면이 끓는다. 피 끓는 어린 청춘들은 돌이라도 씹을 태세다. 다 끓은 라면에서는 고기 국물 향이 나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각자 들고 온 젓가락과 밥그릇에 라면을 가득 담고 후후 불며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다. 

아~하 모래사장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 그 라면의 고소하고 기름진 맛!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의 맛을 알 수 없다. 

고개를 돌려 길가를 보는 순간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하얀 백합꽃처럼 걸어오는 누나의 모습은 한 송이 꽃이었다. 

모두 먹다 말고 백합꽃이 걸어오는 쪽으로 눈이 고정되었다.

물을 얻은 횟집 누나가 스테인리스 그릇에 김치를 담아 온다. 물론 뒤 따라오는 또 한 명의 누나가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말씨로 

"라면만 먹지 말고 김치랑 같이 먹어!"

아~ 백옥처럼 하얀 손이 우리가 둘러앉은 자리에 김치를 놓는다. 

우리는 허겁지겁 김치와 라면을 번갈아 먹는다. 김치는 집집마다 맛을 달리한다. 

역시 바닷가 맛이다. 조금 짠맛?(나와 몇몇 친구는 어머니가 경상도가 아니라 김치를 싱겁게 먹었다.)

몇몇은 순간 얼굴이 찡그려지지만 좀 짜면 어떠랴!

예쁜 누나가 주는 맛있는 김치인데!

두 누나는 우리 곁에 자리하고 앉아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의 마지막 끝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그 표정이 얼마나 예쁜지 말로 표현하기 조차 어렵다.

젓가락 끝을 입에 문 나는 석양에 물든 빨개진 누나의 통통한 두 뺨을 보면서 황홀경에 빠진다. 

국물까지 싹 비운 우리는 김치 그릇을 재빠르게 잡으려 한다. 그릇 주는 핑계로 누나의 고운 손끝을 건드려 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나 알아차린 누나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우리보다 더 빠르게 김치 그릇을 쥐고 

"오늘 김치 줬으니 다음에는 빈 손으로 오면 안 돼!"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어여쁜 누나들은 뒷모습을 보이며 총총이 사라진다. 

모두 침 한 번 꿀꺽 삼킨다. 벌써 주변에 어둠이 스며든다. 

늦게 왔다고 집으로 가서 혼날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후다닥!'

정신없이 발에 묻은 모래를 대충 털고 우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뛴다. 

종점인 정류장에서 버스 탄다. 우르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버스 안내양이 질겁을 한다. 

악동들 일곱여덟이 우 하고 버스에 올라 타니 말이다. 

운전석에 앉은 버스기사 아저씨가 

"조용히 하고 가자!"

하신다. 우리는 일제히 '네'라고 대답하고 여기저기 빈자리에 앉는다. 

두 쌍의 데이트 족이 버스에 올랐다가 시커먼 악동들을 보고 흠칫 놀란다. 

아무리 어리지만 우리는 신사다. 

모두 먼 산 쳐다본다. 버스는 출발하고 이제 빛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버스는 달린다. 

정류장 한 10분쯤 지나면서 친구들이 하나 둘 내린다. 

그리고 십 분이 더 지나 나도 내린다.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모래사장에서 뒹굴고 땀 흘린 뒤 마구잡이로 끓인 라면의 구수한 맛과 우리에게 김치를 전해 준 고등학생 누나들의 가녀린 손 끝을 생각하며 웃음 가득 머금고 집으로 향한다. 

물론 그날 어머니에게 뒤지게 혼났다. 공부한다고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온 모습은 놀다 온 표시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땀냄새는 기본이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으니 아무리 세수를 한들 밖에서 뛰어놀았다는 증거가 분명하다. 

아버지는 빙그레 미소 지으시고 동생들은 꼬시다는 표정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나에게 추억을 한 페이지가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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