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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Mar 16. 2022

독서 일기

책 읽기 시작

요즘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상상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며 여러 가지 교재로 아이들은 책상 앞으로 끌고 오지만 상상은 책상머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람 혹은 어떤 대화 속에서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다. 상상력은 시쳇말로 멍 때리고 있는 순간에, 모든 아이디어는 어느 순간 불현듯 멍한 상태일 때 떠오른다. 

상상은 감성이다. 감성이 교과서 공부하듯이 나오지는 않는다.

학교는 상상력을 키우지 못한다. 뭔 숙제는 그렇게 많으며 외울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주기율표 외우느라고 죽다 살아났다. 고등학생 때 수업 중에 몰래 하이틴 로맨스 소설 읽다가 오뉴월 장마에 먼지가 나도록 선생님에게 맞은 적도 있다. 

외우는 것은  왜 그리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수학 시간은 고역이나 다름없다. 그 지겨운 수학 시간에 소설을 숨어 보았다. 

숨어 읽는 책은 더 재미가 있다. 

그러나 들키는 순간 지옥문이 열린다. 

들켰다!

선생님 말씀

"이 새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연애질 하려고 이따위 책이나 읽어! 이런 한심한 놈아!"

나는 그저 선생님의 잔소리는 한쪽 귀로 흘리고 매는 맷집 좋게 맞고 말았다.

사춘기 소년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소설 속에 묘사된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그 소녀와 과수원에 핀 하얀 배꽃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매는 뒷전이고 그 상상으로 아픔을 견딘다. 물론 책은 종례 시간 담임 선생님에게 돌려받지만 그때도 그냥 받지는 않는다. 몇 대 맞고 받는다. 

고교 시절 대학 입시라는 대명제는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드렸다. 

책, 독서는 배부른 소리다. 교과서는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은 엉뚱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상상의 날개를 달고 나는 과거와 미래 현재의 여러 곳에 여러 인물이 되며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어 다른 삶을 살아가는 상상 속에 행복해한다. 

책!

어떤 영화도 미술 작품도 책 보다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 

영화와 미술은 시각화되어 있다. 배경은 형상으로 나타나 나의 상상의 그 속에 주인공이 내가 된다는 것뿐이다.

책의 묘사는 되어 있지만 내 상상이 더해져 나만의 세계가 된다.

글 속에 표현된 배경과 인물이 나름의 생각과 상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요즘 이야기하는 가상현실 세계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상은 다시 다른 상상을 만들고 무한한 나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게 한다. 

현실의 무거움을 책을 읽고 생각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잠시 현실일 잊고 나만의 세계로 훨훨 날을 수 있다. 


아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자식의 교육열에 불타고 계셨다.  

다른 친구들 아버지에 비하면 자식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70년 대 초반의 아버지들이 대개 그러하듯 일 때문에 늘 늦게 집에 오셨다. 

단꿈을 꾸고 있는 이른 새벽에 어렴풋한 형광등 불빛이 건넌방에서 안방으로 스며들어오고 잠결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 주신 아침상을 받고 계신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이 되어서야 귀가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잠을 자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참지만 이불에 꼬꾸라져 잠이 든다. 

막 잠이 들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순간 얼근하게 취하신 아버지의 숨소리가 귀가에 들린다. 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술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냄새는 우리들 머리맡에 잠시 앉아 내 얼굴과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고 잠시 흐뭇한 얼굴을 내려다보시고 방을 나가신다.

선 잠이 들었던 나는 솥뚜껑 같은 커다란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며 포근하게 잠이 들곤 했다. 

아버지의 애정이 좀 과하다 싶어 어떤 때에는 친구들에게 좀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어쩌다 일찍 출근하지 않으시는 날 아버지는 우리 남매의 가방을 모두 들고 손을 잡고 학교에 바래다주셨다. 오, 육 학년이 되어서도 맏아들인 내 손을 잡고 다니시려 했으니, 나는 친구들 볼까 늘 노심초사했었다. 아버지 손을 잡는다는 일은 초등학교 오, 육 학년이 되면 창피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붉은 놀이 어스름하게 해를 숨길 즈음에 현관에서 여느 때처럼 벨 소리가 울렸고 낯선 아저씨가 어깨에 커다란 박스를 매고 서 있는 모습과 마주 하였다. 뒤 이어 아버지가 현관문으로 들어오셨다. 

낯선 아저씨는 어깨에 울러 맨 박스를 마루 위에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나와 동생이 뭣도 모르고 낑낑거리며 옮긴 박스의 위쪽에는 어린이 동화책이라는 인쇄물이 붙어 있었다. 

동화책!

지금처럼 책을 쉽게 살 수 있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집집마다 없는 시절이었다. 숙제고 뭐고 다 팽개쳐 놓고 친구들 집에 간다. 동화책이 있던 친구 집에는 늘 두 세명이 와서 놀았다. 

잘 사는 집 친구 집에는 동화책이니 장난감 같은 것이 많았다. 

이제 막 생활이 윤기가 돌던 70년 대 초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친구 집에서 보는 책은 어제든지 볼 수 있는 친구에 비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었다. 

책을 가진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친구가 공부도 잘했다. 

책이 많지 않은 시절에 어린놈이 라디오 드라마를 즐겨 들었다. 텔레비전보다 라디오 드라마가 더 재미있었다. 영상은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지만 소리로 들려오는 표현은 내가 마음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책도 그와 같다. 책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다. 

생각하지 못하면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게 어린아이 때의 동화책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딱 어울리는 도구였다. 

그러나 도구가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대단한 사건이었다. 친구들 집에 있던 동화책이 부러웠다. 그래서 늘 동화책을 꿈꿨는데 역시 꿈은, 생각은 이루어지는가 보다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대한 강열한 교육열에 더해 가정판매를 하던 책 외판원이 아버지에게 책의 중요성을 그럴싸하게 말하여다. 왜냐 하면 그 동화책 전집이 가격이 그리 녹녹지 않았던 까닭이다. 

(60년 대말에서 70년 대 중반까지는 책 외판원이 있었다. 주로 10권 20권 30권 전집을 팔러 다녔다) 

가뜩이나 자식에게 뭔가 늘 해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에 바로 구매를 결정하셨다. 

요즘은 대 여섯 살에 글을 다 익히지만 그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더 컸기 때문에 일곱 살인 나는 이제 겨우 어머니로부터 기역니은 디귿......, 아야 어요 우유........ 정도를 배우고 있던 때였다. 

당연히 동생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 그대로 글 한 자 읽지를 못했다. 아직 학교 가기 전, 내가 어머니에게 배우던 기억 니은 디귿을 뒷 글 저 겨우 몇 글자 읽는 정도였다. 그 시절의 조기 교육이라 해야 겨우 1학년 국어 책 몇 페이지 띄엄띄엄 읽는 정도면 조기 교육이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부엌에서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시고 아버지는 그림동화책을 펼쳐 열심히 보고 있는 우리를 흐뭇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버지의 미소는 당신이 느끼시는 충만감과 뿌듯함이 함께 했다. 

나도 아버지였다. 그때 아버지가 느꼈던 감정을 나도 20여 년 전에 느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나도 행복했고 가슴 한 곳이 뿌듯해 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한 순간 행복하다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아마 그런 생각이었으리라!

나이 육십이 가까워 오지만 그때의 아버지가 그립다. 솔직히 나이를 먹어 갈수록 아버지가 참 그립다. 

젊은 시절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제 내가 그 자리에서 서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때 그 얼굴 표정이 정확히 생각이 나겠냐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덥수룩하고 까칠 거리는 얼굴 수염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시는 모습, 자식을 위해 뭔가를 하고 계시다는 뿌듯함을 얼굴 가득히 보이셨다.


호랑이나 혹 뿌리 아저씨 그림이 그려 있는 책을 집어 들고 펼쳐 본다. 그림 동화책답게 색이 선명한 그림 속 동화의 주인공이 춤을 춘다. 글보다는 그림으로 이해를 한다. 오히려 상상을 일으키는 데에는 글 보는 그림이 더 좋다.

그래도 그림으로 줄거리를 이해한다. 

나의 책 읽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동화책이니 위인전은 손에 쥐지 않았다. 

위인전 덕분에 역사를 전공했는지는 몰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위인전은 읽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이야기보다는 줄거리가 있고 머릿속은 도화지가 되고 나는 그 도화지에 내가 상상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중학교도 가지 않은 초등학생이 중고등학생이 되어야 읽는 소설을 읽었다. 

아마 만화방에 가지 못하게 한 이유 중에는 나이에 맞지 않은 책들도 있기 때문에 아니었을까 만화방에는 만화책만 있는 게 아니었다. 헌책과 하이틴이 

역시나 나의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불타오르는 교육열 때문이셨는지 모르지만 청소년, 다시 말해 중고생이 읽는 세계 문학전집과 한국 문학 단편 전집을 사 주셨다. 

책을 읽고 나면 한 동안 그 책의 주인공이 되어 헤매고 있었다. 음미하고 거울 앞에서 연기라면 연기도 해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지기도 한다. 

세계문학전집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좀 이른 나이에 육체적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초등학교 5학년이 소화 하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책을 접하면서 동화책이나 위인전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책 읽는 즐거움을 알 수 있었다. 줄거리가 있고 주인공이 살아가는 모습에 내 감정이 들어가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오락가락하며 머릿속에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감수성과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강열했던 그 시절, 나는 소설 속에 사랑이야기에 완전히 빠져 있을 정도였다. 

6학년을 앞둔 겨울 방학이 되자 서울에서 내려온 세 살 터울의 종고모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우리는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거실에 책장의 놓으셨다. 책을 거실에 두었으니 가장 많이 생활하는 거실에서 앉아 우리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몰라도 나와,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고모는 아버지가 사준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할 때였다. 우리는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장면의 상상하며 몸짓도 해보며 책이 주는 감동을 마음껏 느꼈다. 

단편 선집 중에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읽고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왜 여자 아이가 죽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과 소년과 소녀가 함께 들로 산으로 다는 부분에서는 소년은 내가 되어 있었고 소녀는 내가 상상에게 그리던 예쁜 여학생으로 둔갑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가끔 단편 소설 '소나기'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처음 읽을 때의 감동은 없다. 

나이 탓일까? 그러나 설렘은 항상 그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느껴진다. 

 

여름 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집에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니던 친척들이 집에서 며칠 지내다 가곤 했다. 

초등학생의 눈에 교복을 입은 혹은 성인이 된 대학생 친척들은 나의 호기심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는 옹달샘과 같은 존재였다. 숙제 거리를 들고 와서 함께 숙제를 하기도 했다. 

여름이 지금처럼 그리 덥지 않은 시절에 믿기 어렵겠지만 일본식 다다미가 깔린 바닥에 앉아 커다란 앉은뱅이 밥상을 펴 놓고 촌수로 당숙이나 고모가 되는 친척 두 세 사람과 나와 남동생 그리고 가끔 어린 여동생까지 둘러앉아 아직 더위가 심하지 않은 아침 시간부터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우리는 숙제도 하고 책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창 너머로 들리는 매미 소리와 길 가의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는 요즘의 계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여러 책을 읽었다. 책도 책이지만 대학을 다니던 5촌 종고모와 함께 서점에 가서 고모가 산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가 눈에 띄었다. 

그 잡지는 정말 나에게 또 다른 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 시절의 책은 세로 쓰기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세로 쓰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때는 세로 쓰기가 대부분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구한말 때까지는 모두 세로 쓰기로 되어있으니 굳이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고는 볼 수 없다. 

완전 신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의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한자를 병용해서 쓰지는 않지만  그때만 해도 한자가 섞여 있었다. 

주요한 단어는 거의 한자로 되어 있어 책을 읽으려면 한자를 알아야 했다. 물론 학교 교과 과정에도 한자가 있던 시절이었다.

문학잡지나 에세이에 관련된 잡지는 나에게는 신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이나 수필 희곡이 저체를 다루지 않고 부분 부분만을 공부했다. 글 전체가 실린 잡지를 읽고 나면 나는 한 동안 소설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수필에서 느끼는 인생과 자연에 마음이 빠져 버렸다. 

완전 신세계 속으로 푹 빠지게 되었고 그때까지 방학 숙제는 뒷전이었고 공부도 뒷전이었다. 특히 산수 공부는 정말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학생의 신분이기에 숙제와 꼭 해야 할 문제 풀이를 끝내고 나서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 책에 빠져 살았다.

가끔 모르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은 대학생 고모의 친절한 설명이 점심시간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어머니는 무척 좋아하셨다. 책을 이야기하고 느낌을 이야기하고 어머니도 어느새 그 대화에 동참하시어 어머니의 잊었던 학창 시절을 추억이 소환되곤 했다.  

그렇게 책은 내 삶 곁에 그냥 따라다녔다.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도 아버지에게 참고서나 문제집 살 돈을 받으면 한 권 빼먹고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수업 중에는 읽고 있던 책의 뒤가 자꾸 궁금해 교과서 안 쪽에 숨겨 교과서 읽는 척하면서 책을 읽기도 했다. 

들키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들키는 일이 종종 생겼다. 역시 선생님들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 탓일까 

교무실에 불려 가 혼이나기도 했지만 책을 보는 것을 그리 책망하지는 않았다. 

대학 때는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책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한 페이지라도 읽었으니 말이다. 


뭔가 손에서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읽고 적게 읽고 가 문제가 아니었다. 읽은 책을 또 읽어도 자꾸 새로움에 눈을 떴다. 

'키다리 아저씨' '제인 에어' '코스모스' 그리고 국내외 단편 전집은 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학생 때 잠깐 읽고 던져 버린 주역이 한 동안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오십 중반을 넘어가는 이쯤에 나는 조그마한 산골에 자리 잡고 큰 욕심 내지 않고 땅을 벗 삼고 푸른 초목을 벗 삼으며 산다. 

힘들고 어려운 삶이 계속되지만 얼마 전부터 다시 책을 손에 쥐어 본다. 읽은 책을 다시 봐도 늘 새롭고 새로 나온 책을 읽으며 신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되는 기쁨을 맛본다. 

책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 무속에서는 글 문신이 있다고 한다. 그 신에게 빠지면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책은 확실히 마음을 살찌운다. 술을 먹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먹을 때 기분은 온 데 간데없고 불쾌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들 먹고 나면 그때뿐이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밤거리를 걸어 봐도 그때뿐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뭔가 가슴속에 뿌듯함이 몰려온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마치 긴 여행을 갔다 온 기분이 든다. 모르는 미지의 세계, 또 다른 나의 삶을 살고 온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그 묘한 감정이 내 손에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지 모른다. 

서점에 가니 읽어 보지 못한 책이 넘쳐 난다. 스마트 폰으로도 책을 볼 수 있다. 

삶이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지루할 틈이 없다. 텃밭을 가꾸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다시 책을 읽고 자연과 벗 삼는 삶 속에 지루함은 저 멀리멀리 흰 구름에 실려 떠나간다. 

비록 모습은 가난하지만 마음은 시들지 않는 꽃처럼 아름답고 풍요롭다. 

어느 날 아내와 저녁을 먹고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 놓고 아내는 바느질을 하고 나는 책을 본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고 라디오도 틀지 않고 사방이 고요함에 묻힌 겨울밤에 아내가 바느질을 하다 말고 한마디 던진다. 

"고요한 침묵 속에 커다란 울림이 있는 기분이네!"

아내는 철학자가 된 모양이다. 깊고 고요한 침묵이 마음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 온 모양이다. 

책을 덮고 아내를 바라본다. 

눈 마주친 아내가 계면쩍은지 차 한 모금을 마신다. 

책과 함께 깊어가는 겨울밤이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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