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아침

금강경과 주역을 생각한다

by 마리아

비가 내린다.

모처럼 시원하게 창 밖으로 빗줄기가 쏟아진다.


젊었을 때는 비가 내리면 왠지 모를 낭만이 먼저 마음을 적셨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비 맞으며 걷던 거리, 창가에 앉아 빗소리 들으며 읽던 엘리엇의 시집

그러나 낭만의 비는 어느새 가슴을 떠나고 현실의 걱정이 자리를 채운다.

저 많은 빗물이 혹시 어딘가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삶이란 어쩌면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는 것일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고맙다.

오랜만에 집 안 가득 고요한 시간과 빗소리가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금강경을 펼쳤다.

금강경은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어온 책이다.

주역과 함께 내 삶의 깊은 물줄기를 이루는 두 개의 흐름이기도 하다.


나는 금강경의 15장에서 18장을 가장 좋아한다.

거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내가 쥐고 있는 생각조차 비워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비어 있음 속에서야 비로소 평온해진다는 그 깨달음.

하지만 의식과 생각조차 사라져야 한다는 말에는 아직도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길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비는 무엇인가.

물이다.

물은 씻김이고 순수함이다.

태초의 생명을 품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매개체다.


창밖에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을 보고 있지니

금강경의 말과 주역의 말이 하나의 노래처럼 들려온다.

금강경에서는 모든 유위법은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같고, 이슬 같으며 번갯불 같다.

주역은 변화는 때를 따라 흐르고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한다.


비가 바로 그 모습이다. 고정된 형태도, 머무름도 없다.

텅 비어 있으나, 그 골간은 다시 채워지고 흘러간다.

그 모습은 마치 금강경의 "공"(비어 있다)이며, 주역의 변화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 창밖의 비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하늘이 빈 마음으로 내리는 노래다.

물방울 하나하나에 생명의 숨결이 담겨 있다.

텅 빈 듯 가득하고, 가득한 듯 비어 있다.


나는 종종 금강경과 주역을 하나의 책처럼 읽는다.

두 책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다.

비어 있음과 채움의 순환, 변환 속에서 자유로움을 얻는 길.

고정된 "나"라는 것도 없고 붙잡을 무엇도 없으며, 흐름 속에서 그대로 존재하는 것.


비는 지금도 내리고 있다.

내 마음도 잠시 그 흐름에 맡겨본다.

생각이 떠오르다 사라지고,

감정이 일어났다 고요해지고,

모든 것이 한순간 물거품 같음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내가 가진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한다는 가르침,

그 안에서 참된 평온과 자유가 깃든다는 진리를

오늘 빗소리가 새삼 또 한 번 일깨워준다.

금강경과 주역은 결국 하나의 노래다.

비와 같고 물과 같고 변화의 흐름과도 같다.


오늘, 이 비 내리는 아침에

나는 흐르는 시간 속에 한 방울 물이 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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