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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Mar 07. 2020

어머니의 요리

자장면 한 그릇 먹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자장면 한 그릇 잘못 먹고 눈물 콧물까지 흘려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난 흘려 봤다!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은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먹을 것 하나 가지고 그렇게 그렇게 혼이 나고 울어 본 일이 없다. 너무 부끄럽고 점심에 먹었던 자장면을 뱃속에서 존재조차도 남기기 싫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조차도 야단맞는 내 모습이 측은 했는지 아버지를 말릴 정도로 그 날 먹었던 자장면은 잊을 수 없다. 

얼떨결에 사무실에서 시켜 주던 유니 짜장면을 먹고 그날 밤에 나는 엄청나게 혼이 났다.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살아오신 나날을 보았고 나는 그 비싼 자장면을 먹은  나의 모습에 부끄러웠다.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있는 경지는 어디까지 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생각은 이 나이를 먹도록 진행 중이다.


고삼 학력고사도 끝나고 갈 학교도 정해지고 그 사이에 친구들은 그동안 놀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며 당구장이니 롤러스케이트 장이니 아니면 여학생과 미팅이니 하며 신나는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제수는 생각지도 말라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엄명에 나는 순종하고 그동안 읽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마음 놓고 보지 못하던 책과 보고 싶은 영화를 실컷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그쯤에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테이프를 대여한 대여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늘어진 팔자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의 모습이 약간 한심하게 보였는지 전보다 잔 소리가 더 많아지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녁 식탁에서 나에게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용돈 벌이 삼아 한 달 정도 아니면 입학할 동안만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사무실에 나와 사회도 배우고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도 알고 세상 공부할 겸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씀에 어머니도 찬성을 하시고 나도 사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버지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아버지는 다음날부터 바로 일을 해보라고 하셨다. 

괜히 마음 바꾸기 전에 붙잡아 두시고 싶은 생각이셨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 일을 도울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아버지와 서먹했던 사춘기 시절을 지나고 이제 아버지를 알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8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니 일찍 서둘렀다. 한동안 시험을 끝내고 늦게 일어나던 나는 다시 고삼이 되었다. 그 힘들고 악몽 같은 시간이 생각이 난다. 나도 나지만 새벽밥을 지어 도시락 두 개와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께 미안했다. 일어나 계시는 어머니는 아침을 든든히 준비해 주신다. 

 겨울의 아침은 7시 반이 되어야 어둑어둑한 새벽이 물러나고 막 해가 더 오르려는 그런 시간이다. 늦게 해가 오른다. 새벽의 여기가 남아서 인지 몸속은 살이 파고드는 느낌의 공기를 마신다.

 아버지 회사의 작업 복이 마침 집에 있어 겨울 잠바 대신에 작업복 잠바를 입고 출근한다. 

어째 기분이 참 묘했다. 상호가 박힌 작업복 잠바를 입고 버스 타고 가는 나 스스로의 모습이 대견했다. 그리고 나도 학생이 아니 사회인이 되었다는 착각에 괜히 어깨가 우쭐했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출근할 수도 있지만 버스를 탔다. 아버지와 함께 가면 아무래도 출근 시간보다 30분에서 한 시간은 늦게 출근한다. 아버지는 직원들과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식사하고 똑같이 퇴근해야 한다고 못 박으셨다. 그러면 한 달 수고비를 주는데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중 고등학교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버스 타는 일이라고는 학교에서 소풍 갈 때 외에는 타고 다닌 일이 없었다. 출근과 등교가 비슷하다. 도착한 번스는 사람들로 빽빽하다. 콩나물시루 안에 콩나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겨울 버스 안에는 히터가 돌아가고 사람의 열기에 몸이 후근 해졌다. 일단 타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밀착된다. 15분 정도 버스 타고 가는 동안 버스 천장과 발 밑만 보고 갔다. 내리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틈 비집고 내려야 하는데 밀치고 내릴 때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괜히 죄지은 일도 아닌데 미안하다. 

출근하면서 진이 다 빠졌다.(약골이야! 약골!)


작업복을 입고 들어 오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일하신 아저씨들이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어깨도 두드려 주셨다.  내가 태어나고 코 흘리고 동네를 뛰어다닐 때 일 하러 오신 몇 분이 아직 그대로 일하신다. 코흘리개가 벌써 이만큼 컸냐는 것이겠지!

일하는 직원들은  나보다는 형이고 누나뻘 된다.  모두 웃으며 맞아 주신다.

 함께 청소를 하고 일 시작 전에 커피를 함께 마셨다. 아마 그날 마신 커피 맛은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 같이 포장된 믹스 커피가 나오기 전 시절이었다. 적당히 커피와 설탕 프리마를 섞은 커피가 달짝지근하게 맛있었다. 다들 담배 한 대 피우는데 결혼 한지 일 년쯤 된 형이 담배 한 개비를 권한다. 호기심에 몇 번 피웠던 담배였다. 시험을 끝내고 친구들과 피워보기는 했지만 일하는 곳에서 피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한 개비 슬쩍 피웠다. 일하는 분들과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이라는 걸 생각해 보지 않고 바로 일터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학을 들어가게 된 내 모습이 부러운 듯 학교에 대해서 묻는다. 돈이 사람의 능력을 짓누른다는 생각을 처음 가져본 날이다.

 

시험 끝나고 대학 입학 때까지 빈둥거리는 내 모습이 아버지가 보시게에는 그다지 예뻐 보이지는 않으셨다. 

또래나 또래보다 조금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일터로 나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과 나의 모습이 비교되었을 게 분명하다. 

나도 생각 없었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우물 안에 개구리가 그 우물의 크기만 바라보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없던 시절 아침에 출근하면 거의 12시간 이상을 일을 한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까지 아니면 8시까지 일을 한다. 

강도 높은 일이었지만 모두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다. 

 사무실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다. 전기와 관련된 자재를 취급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2만 2천9백 볼트라든지 1만 5천4백 볼트 정도의 고압 전기를 다루는 제품들을 판매하고 공사도 직접 했다. 사실 8시까지 출근했지만 벌써 아저씨 두 분은 7시부터 일을 하고 계셨다. 현장에 나갈 준비도 하고 거래처의 현장 직원들이 자재를 사러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내 생활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한 개비 담배를 피울 때까지는 천국이었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전기 자재들이 그렇게 무거운 지 처음 알았다. 

 무거운 자재를 들고 창고로, 차로 뛰어다니다시피 한다. 오전에 물건을 준비하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 모든 외근 준비를 끝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 

스위치만 켜면 들어오는 전기에 숨어 있는 노고가 있다는 걸 보았다. 

이제 점심이 되었다. 겨울 날씨지만 다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일의 강도가 강하다. 나는 더 죽을 지경이다. 힘든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형들과 아저씨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 했다. 

짬짬이 쉬기도 했지만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내 목에 밥이 넘어갈 때마다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하루의 반이 지나갔을 뿐인데 거의 기진맥진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 시절에는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밥 집이 배달하는 곳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다. 기껏 중국집에서 볶음밥이나 짬뽕밥 같은 음식을 시켜 먹거나 가게 주변의 아주머니들이 배달해 주는 양은 도시락이 전부였다. 

오늘은 중국 음식을 먹는 날이었다. 날짜를 정해 놓고 먹는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처럼 오늘은 뭘 먹지를 고민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경리 일을 보는 누나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메뉴를 정해 놓았다. 오늘은 중국음식을 시켜 먹는 날이었다. 한국사람은 밥심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밥이 물릴 때가 있다. 다들 짜장면이나 가락국수 짬뽕을 시킨다. 단골로 배달해 먹는 중국집에서 알아서 양을 조절하여 배달한다. 주변의 중국집들은 다른 중국집에 비해 같은 음식이라도 조금 양이 많다.

경리 누나와 얼마 전에 군대에서 제대하고 일을 하기 시작한 형이 옆에서 음식 메뉴를 받아 적고 있다. 아무리 중국음식 먹는 날이라도 각자가 가진 기호를 똑같이 맞출 수는 없다. 잡채밥 볶음밥  가락국수 짜장면을 골고루 시켜 달라고 한다. 나는 짜장면을 시켜 달라고 했다. 모처럼 먹는 중국음식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대뜸 형이 유니 짜장을 먹으려나 하고 묻는다. 누나도 유니 짜장 먹으라고 하며 전화기를 들고 중국집에 전화를 건다. 이제 배달이 될 때까지 오전에 전쟁 같았던 창고를 정리한다. 일반 짜장보다 유니 짜장이 맛있지 하며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아버지는 아마 손님들과 식사를 하러 가셨겠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 정리를 끝낸다. 그 사이 음식이 배달되었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다. 모두들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나도 함께 둘러앉는다. 사장 아들이라는 생각은 없고 나도 그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이었다. 뭔가 가슴이 뿌듯하다. 보람 되게 일을 하고 밥을 먹는 게 이렇게 가슴 뿌듯한 일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걸 가르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소고기를 갈아서 춘장에 볶은 유니 짜장은 고기가 많아서 그런지 맛도 좋았다. 다들 맛있게 먹는다. 

처음부터 이상 했다. 다른 사람들 시킨 자장면과 내 짜장면이 달랐다. 그들은 일반 자장면이었다. 나는 다 같이 시켜 먹는 줄 알았다. 나의 그 맛있는 점심이 화가 되어 돌아올 줄 모르고 시시닥 거리면서 맛있게 먹었다.

김치가 빠질 수 없다. 사무실 냉장고 안에는 이런 순간에 먹으려고 넣어 두었던 김치가 나온다. 집집마다 가져온 김치 맛이 모두 각각의 맛을 내고 있었다. 같은 음식인데 이렇게 다른 맛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곱빼기는 역시 양이 많았다. 배도 든든하고 배가 든든하니 행복감이 충만하다. 등 따시고 배 부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더니 딱 그 모습이었다. 오후 시간 외근 나가는 트럭에 전표를 적고 물건이 빠짐없이 실렸는지 확인을 한다. 물건을 나르는 일보다는 차에 실린 물건이 잘 실렸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  일할 사람들을 불러 놓고 부품이 하나 없어서 현장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두세 번의 점검이 끝나고 현장으로, 공장으로 차가 떠나면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린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할 때쯤 되면 모두들 하루의 노고에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고 이제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갈 준비를 한다. 

그때쯤 경리 누나는 아버지에게 하루의 살림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 하는 시간이다. 누나의 하루 중 가장 빠른 시간이 된다. 결재 철에 일지와 전표 서류를 넣고 아버지 앞에 선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자상하고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었다. 작은 유리창에서 누나는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혼이 나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에게 불러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 비싼 점심을 먹었냐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그저 같은 짜장면인 줄 알았다. 

어쩐지 먹을 때 내 짜장면과 다른 짜장면을 먹을 때 뭔가 찜찜했다. 경리 누나와 형은 나를 생각해서 시켜 주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덥석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엄청 화를 내시고 일장 훈계를 하신다. 나는 몰랐다고 하고 싶었고 옆에서 같이 창고를 정리하는 형이 먹으면 어떻겠냐고 해서 얼떨결에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 형이 아버지에게 혼이 날 것이다. 나는 비록 아버지가 경영하는 직은 회사의 단기 알바 생이었지만 세상에 돈이 이렇게 무섭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새삼 새롭게 보였다. 작은 일에 아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말씀에 나는 끽소리도 못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주시는 용돈에서 점심으로 초과된 부분을 빼고 용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금액은 그 시절 돈으로 천 원이나 더 비싼 짜장면을 먹은 셈이다. 중국집 짜장면 가격이 기계식 짜장면이 5백 원 육백 원을 하였고 중국집 자장면도 천 원을 넘지 않던 시절 나 혼자 좋다고 이천 원짜리 짜장면을 먹었으니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만도 했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먹을거리에 대해 돈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필요한 것을 모두 다 가질 수 있었다. 부끄럽다.(너무 부끄러웠다)

그 날은 아버지가 다른 약속이 없었다. 함께 퇴근해서 현관문에 들어서는 우리 부자를 보고 어머니는 매우 흡족해하셨다. 들어오는 나의 얼굴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첫날 출근해서  뭐 크게 잘 못한 일이 있어 아버지에게 혼이 났었구나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아버지가 하신 일에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고 사람들의 눈이 있었다. 

그리고 자장면 한 그릇 때문에 내가 스스로 얼마나 못나게 굴었는지 생각을 했다. 비록 일하는 누나와 형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분명한 것은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여덟 그릇이나 되는 식사에서 자장면도 있었다. 내가 조금만 생각을 했었으면 내가 먹는 자장면과 다른 일하는 분이 시킨 자장면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돈 오백 원 천 원으로 화를 내시는 이유를 나는 다 늦은 저녁에야 깨달았다. 

그저 가방을 메고 돈을 타 쓰고 다니는 때와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때에는 차이가 있었다. 아침에 작업복 잠바를 입고 왼쪽 가슴에 상호가 적혀 있는 작업복을 입고 우쭐한 기분이 든 내가 부끄러웠다. 

야단맞을 때 아버지가 야속하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모두 달아났다. 

좋아하는 우유를 들고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래도 맏아들이 아버지의 사업장에서 처음으로 일한 날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니 마음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이제부터 책이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세상을 배울 때가 됐다며 기분을 풀고 내일도 즐겁게 나가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날 자장면 한 그릇이 나에게는 별개 아닌 짜장면이었지만 아무도 먹고 싶은 것을 선뜻 사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철없는 행동 하나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가슴에 깊이 새겼다.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 그리고 나 때문에 혼이 난 경리 누나와 형이 아직도 미안하다. 유니 짜장 한 그릇이 인생의 많은 것을 깨닫는 도구가 되었다. 아직도 배울게 많은 인생이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은 사람을 보라는 말씀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에 남은 어떤 마음일까라는 이해심을 이야기해 주셨다. 

타인은 나에게 괌심이 없다. 그렇지만 나의 행동에 타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작은 마음이 있다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배려가 생기고 그리고 좀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날 나는 유니 짜장 한 그릇 잘못 먹고 정말 많이 울었다. 혼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부끄러움이 나를 괴롭게 했다. 

시간은 많이 흐르고 그리 많이 변화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음~

 갑자기 짜장면이 먹고 싶다. 그때보다 훨씬 비싼 짜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오천 원 넘어가는 자장면을 잘 사 먹지 않는다. 찬바람이 선들선들 부는데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자장면이나 만들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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