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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Dec 02. 2017

쿠바: 영화 문라이트의 뽀요 알라 플란차

요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의 의미

누군가에게 요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를 먹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류는 먹는 일에 생존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한 솥밥을 먹는 사이'나 '식구(食口)'와 같은 표현에도 드러나듯이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깊은 결연을 맺는 일을 의미하기도 했다. 잔치와 예식에는 음식이 빠지지 않았는데, 이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곧 그에게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요리가 아님에도 군침이 도는 요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항상 있었다. 하지만 작년 이맘때 개봉한 영화 "문라이트(Moonlight, 2015)"에 등장하는 요리는 더욱 특별해 보였다.



충분히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니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요리 소개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주인공 샤이론(Chiron)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첫사랑, 케빈(Kevin)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케빈이 어느 날 홀연히 전화를 걸어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불러내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은지 어느덧 10년. 몸집이 조그마하여 '리틀(Little)'이라고 불리며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샤이론은 이제 우락부락한 몸에 가짜로 끼운 금니를 번쩍이는 마약 딜러가 되었다.


식당에서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케빈은 완전히 변해버린 샤이론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멋쩍어한다. 하지만 더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샤이론이다. 요리를 준비하겠다며 자리를 뜬 케빈을 기다리는 그의 눈빛과 널찍한 등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 섬세한 긴장을 눈치챘을까, 카메라는 부엌에 들어서서 요리를 시작하는 케빈을 느린 속도로 담아낸다. 철판 위에서 납작하게 누른 닭가슴살을 굽고, 라임을 잘라 그 위에 라임즙을 뿌린다. 바닥이 납작한 플라스틱 통에 밥을 눌러 담았다 뒤집어 단정한 모양으로 접시에 올린다. 그 곁에 윤기가 흐르는 블랙빈을 곁들이며 그는 살며시 눈을 들어 주방밖에 앉아 있는 샤이론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고수를 잘게 썰어 눈을 뿌리듯 요리 위에 올리는 손길은 샤이론을 살펴보았던 그 눈빛만큼이나 부드럽다.


케빈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샤이론은 물었었다. "왜 나를 불렀지?" "응?" 하고 놀라는 케빈에게 샤이론이 같은 질문을 되묻는다. 케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내가 말했잖아, 어떤 남자가 들어와서는 이 노래를 틀더라고." 주크박스에서 노래를 틀고 자리로 돌아온 케빈이 케빈이 수줍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짓는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안녕 낯선 사람, 다시 만나니 어찌나 좋은지. 얼마나 되었던가? 정말 오래도 된 것 같네. 네가 잠시 들러 인사를 해주러 와서 정말 기뻐. 아마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던 걸로 기억해. 정말 오래도 되었네. 네가 다시 여기에 와서 기뻐. 만약 여기에 머무르지 않을 생각이라면, 예전에 했던 것처럼 나를 대하지는 말아줘.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래. 정말 오래도 되었네. 네가 여기로 돌아와서 나는 정말 기뻐...(Barbara Lewis의 "Hello, stranger" 중)"

  


Moonlight - Kevin Makes Dinner For Chiron

https://www.youtube.com/watch?v=zOVX34w_CKE


0.8배속으로 정도로 천천히 이어지는 케빈의 요리 장면은 영화의 모든 장면 중 단연 아름답다. 검은 콩조심스레 접시에 담고 나서 주방 밖의 샤이론을 살피는 케빈의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 더욱 그렇다. 문라이트를 감독 베리 젠킨스(Berry Jenkins)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이 장면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 그 이유가 드러난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것, 그것은 아주 의도적인 보살핌의 행위입니다. 진정한 친밀감의 교환이지요."


케빈은 과거 샤이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주었다. 어느 누구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둘 중 누구도 이 비극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어느덧 십 년이 흘렀고, 만남을 주선한 것도 케빈이고 샤이론을 위해 정성 들여 식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케빈이다. 케빈의 따스한 시선이 샤이론에게 닿을 때, 샤이론은 아랫니와 윗니에서 가짜로 끼워 넣은 위협적인 금니를 천천히 빼낸다. 복잡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에는 물빛이 일렁인다. 영화에서건 TV에서건 흑인 남성이 다른 흑인 남성에게 요리를 해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감독. 그가 느리게 담아낸 케빈의 요리에는 십 년간 전하지 못했던 사랑의 말이 담겨 있었다.



케빈이 샤이론에게 만들어주었던 요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다. 영화 속에서 케빈은 쿠바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그가 만든 요리도 쿠바의 요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라이트" 팬들의 많은 증언에 따르면, 영화에 등장한 요리의 이름은 '뽀요 알 라 플란차(Pollo a la plancha)'이다. '그릴에 익힌 닭요리(grilled chicken)'라는 뜻의 담백한 이름인데, 주로 닭가슴살을 사용하기에 그 맛 또한 담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담백하기만 한 평범한 닭가슴살 요리라면 쿠바인들이 사랑하는 요리의 위치에 오르기 어려웠을 터, 닭고기 손질에 나름의 비결이 존재한다. 닭고기 중에서도 가장 퍽퍽한 닭가슴살이 사용되지만, 고기는 퍽퍽하기는커녕 쫄깃하고 육즙이 넘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닭가슴살을 반을 갈라 하트 모양으로 펼친 후에 방망이로 두드려 각 면의 두께를 일정하게 해 주는 것이 첫 번째이고, 라임즙과 양념으로 미리 재워서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 두 번째이다.


이 요리를 만들며 영화 속 케빈이 샤이론을 위해 요리하는 장면을 수없이 보었다. 채 일 분이 안 되는 장면이기에 나중에는 그 과정을 외울 정도가 되었다. 닭가슴살을 반으로 가르고 방망이로 얇게 두드려 라임즙에 재우는 을 거쳐 뜨거운 팬에 납작한 닭고기를 익힌다. 밥은 그릇에 담았다 뒤집어서 접시에 예쁘게 담고, 윤기흐르는 블랙빈을 곁들인다. 케빈의 동작을 그대로 따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멀리 지나가버린 인연이 떠오른 탓이다.



[참고 동영상]

Binging with Babish: Pollo a la Plancha from Moonlight

https://www.youtube.com/watch?v=ZsBWgeQHjnM








[뽀요 알라 플란차 재료]

[밥 준비 재료]

- 쌀, 마늘, 월계수 잎, 소금(취향에 따라 적당히 넣어서 밥을 짓는다. 물 높이는 평소 하던 대로 맞추면 된다)


[닭고기 요리 재료]

- 닭가슴살 3 개

- 잘게 다진 마늘 마늘 3 톨

- 라임즙

- 카옌페퍼 1 tsp

- 설탕 1 tsp

- 소금 3 tsp

- 후추 1 tsp

- 올리브 오일 2 Tbsp


[곁들일 요리 재료]

- 링으로 썬 양파 1 개

- 베이컨 2~3 줄

- 다진 양파 1 개

- 다진 청피망 1 개 (마침 청피망이 다 떨어져 파프리카로 대체했다. 맛은 살짝 다르다)

- 블랙빈 통조림 1 개(체로 콩을 걸러내되 남은 물은 따로 보관한다)

- 소금, 후추, 라임즙 약간

- 식용유 또는 올리브유 약간

- [선택] 잘게 썬 고수잎 약간



[뽀요 알 라 플란차 조리법]

1. 닭가슴살은 반으로 갈라 하트 모양이 되도록 펼친다.



2. 조리대 위에 물을 살짝 뿌린 뒤 랩을 한 장 펼친다. 그 위에 닭고기를 띄엄띄엄 올려두고 다시 랩으로 덮는다.



3. 밀대 끝이나 마늘 다지는 방망이 등을 이용해서 닭고기가 가장 두꺼웠던 부분 두께의 절반 정도의 두께가 되도록 두드린다. 각 부분의 두께가 비슷해지도록 신경 쓴다.



4. 마리네이드 재료(다진 마늘, 라임즙, 카옌페퍼, 소금, 후추, 올리브유)와 닭고기를 지퍼백에 담고 냉장고에 넣어 30분에서 1시간 동안 재워둔다.



5. 닭고기가 마리네이드 되는 동안 곁들이 할 콩요리를 준비한다. 양파, 피망, 베이컨 등을 다져서 준비한다.


6. 기름을 살짝 두른 팬에 베이컨을 넣고 베이컨의 기름이 충분히 빠져나올 때까지 노릇하게 익힌다. 기름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면 키친타월 등으로 기름을 조금 닦아내도 좋다.


7. (6)의 팬을 씻지 말고 다진 양파를 넣고 양파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살짝 볶는다. 양파가 조금 부드러워지면 다진 마늘을 넣고 2분 정도 더 볶다가 다진 피망 또는 파프리카를 넣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살짝 볶는다. 체에 걸러둔 블랙빈을 넣고 재료가 잘 어우러지도록 볶는다. 너무 뻑뻑하다 싶으면 따로 덜 어둔 통조림 액을 조금씩 더한다. 소금, 후추, 라임즙으로 간한다.



8. 기름을 살짝 두른 팬에 링으로 썬 양파를 노릇하게 익힌 후 따로 덜어둔다.



9. 예열한 뒤 기름을 살짝 두른 팬에 미리 재워두었던 닭고기를 얹어 익힌다. 스테인리스 팬을 쓰는 경우 닭고기가 덜 익었을 때 억지로 떼어내면 닭고기가 눌어붙어 찢어지기 때문에 한 면이 노릇하게 고루 익었을 때까지 기다린 후 자연스럽게 떼어서 뒤집는다.


10. 마늘과 월계수 잎, 소금으로 맛을 낸 밥은 조그만 공기에 담아 모양을 만든 후 접시에 담는다. 닭고기가 콩 볶음을 나란히 올린 후 링으로 자른 양파를 올린다.



영화에서 케빈이 내놓았던 요리와 그 모양새가 사뭇 닮았다.



라임즙의 힘일지, 방망이의 위력 일지, 닭고기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부드럽고 육즙이 가득하다.


양파와 곁들여도 맛있고 블랙빈을 곁들여도 맛있다.




정말로 맛있는 요리이건만, 이를 맛보는 내 마음이 설레지만은 않은 것은 영화의 탓이다. 떠나버린 사랑이든 연락이 끊겨버린 친구이건 지나간 인연을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 만나는 것만 해도 그러할진대 직접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다니. 스크린에서 너무나도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장면이건만 막상 나의 모습을 대입하는 일은 불편하기만 하다. 과연 그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엇을 기대해야 하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손님이 거의 다 떠나 한산한 영화 속의 다이너 식당 안에서 그 두 사람이 느꼈을 긴장감을, 노련한 두 배우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손동작으로 담아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휘감고 지나갔을 감정의 폭풍은 달빛 아래 철썩이는 파도처럼 요란하지는 않아도 힘찬 것이었을 터이다.





[참고한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Moonlight_(2016_film)

https://www.bonappetit.com/story/moonlight-best-food-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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