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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Nov 04. 2017

프랑스: 자연이 맺어준 인연, 포크 노르망디

사과, 크림, 돼지고기의 운명적인 만남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적어도 그렇게 말하면 위안이 된다. 요리 재료도 그렇다. 인연이 맞는 재료는 자연히 한 요리 속에서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쥬 또는 마리아주(mariage)'라고 불리는 단어를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요리잡지에  특히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와인과 치즈의 환상적인 마리아주', '전통주와 프렌치 요리의 마리아주', '제철 채소와 물오른 해산물의 마리아주' 등등. 좁은 의미로는 와인과 와인에 곁들여 먹는 음식의 궁합 또는 그 조화를 일컫지만 요즘 들어서는 늘어나는 사용빈도와 더불어 그 외연이 크게 확장된 것 같다.


마리아주가 결혼을 의미하는 영어 'marriage'의 프랑스 사촌뻘 되는 단어임을 일찌감치 눈치챈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식재료와 술, 식재료와 식재료 간의 조화로움을 인간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전혀 다른 재료, 예컨대 바다를 누비던 대구와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 자라난 화이트 와인 이라든가, 붉은 피가 흐르던 소와 그 소가 뜯어먹었음직한 취나물이라든가 하는 것이 한 테이블에서 만나 무대의 공동 주연이 된다. 우아하고 격식을 차린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살점을 물어뜯는 진득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이들이 만나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관계, 그것이 바로 결혼이 아니던가. 오늘 여기, 서로 다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각 가정의 아들과 딸로서의 삶을 살아오던 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해 서약을 합니다. 소중한 인연을 기리기 위한 자리에 오신 하객 여러분들께서는 힘찬 박수로 부부가 될 이 두 사람을 맞이해 주십시오...


요리에 걸맞은 와인을 선별하는 것은 소믈리에의 역할이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 또한 재료 간의 조화와 궁합에 대해 늘 고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지역의 자연과 기후가 인간의 역사와 어우러져 요리 재료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할 요리인 노르망디 포크(Porc à la Normande; Pork Normandy)가 그렇다. 사과, 사과주, 크림, 돼지고기로 만드는 소박한 노르망디식 돼지고기 요리. 이 요리 속에는 무르익은 순간 언젠가 마주칠 운명이었던 요리 재료들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좌) 평화로운 노르망디 해안의 풍경 (사진출처: discoverfrance.com)

(우) 사과, 시드르, 돼지고기, 크림이 조화를 이룬 포크 노르망디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영국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듯 돌출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런 위치 탓일까, 노르망디는 유럽 어느 지역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정복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켈트족, 로마제국, 프랑크 왕국, 노르만족백년전쟁,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까지. 새로운 지배자가 노르망디 땅에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노르망디의 바람에는 사과꽃 향기 대신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들었다.


영국을 향해 손가락질 하듯 뻗어있는 노르망디 (사진: 구글맵)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는 스스로의 향기를  지켜나갔다. 노르망디의 '바유돼지(Bayeux pig)'가 그렇다. 바유돼지는 19세기 중반 노르만돼지(Norman pork)와 영국의 돼지 버크셔(Berkshire) 종이 교합하여 태어난 종이다. 2차 대전이 노르망디를 휩쓸기 전까지 이 바유돼지는 요람과도 같았던 바유(Bayeux) 지역, 특히  베쌍(Bessin)이라는 해변 마을의 거의 모든 농장에서 키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해변 마을은 초여름의 어느 날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작전의 작전지로 지명되고 만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그것도 가장 처참했던 '오마하 해변의 전투'의 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44년 6월 6일 미군은 독일군이 방벽을 설치하고 도사리고 있었던 오마하 해변에 상륙을 감행했다. 그리고 단 하루 만에 이들 중 이천 명에서 오천 명 가량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었다.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라는 미군 제1 보병사단 16 연대장 조지 테일러(Geroge A. Taylor)의 말이 이 날의 암담함을 드러내고 있다.


(좌) 바유돼지의 요람이자 오마하 해변의 전투가 이루어졌던 해안마을, 베쌍

(우) '죽음의 입속으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고 있는 연합군(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해변 마을을 정면으로 덮친 포화의 불길 속에서도 바유돼지 몇 마리가 살아남아 가느다란 명맥을 이어갔다. 전쟁이 지나가고 이들의 존속을 다시금 위협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은 바유돼지를 찾아 나섰다. 이들이 수소문하여 찾아낸 것은 5 마리의 숫퇘지와 15 마리의 암퇘지가 전부. 종의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 뒤늦은 관심과 복구의 노력이 이졌다. 오늘날 바유 돼지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꿋꿋이 살아남아 노르망디의 식도락가에서 빠질 수 없는 명물이 되었다. 9개월에서 18개월 정도 야외에서 자라나는 바유돼지는 그 풍미가 뛰어나서 이를 맛보기 위해 멀리서도 바유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좌) 흰 바탕에 검은 점, 앞으로 숙인 큰 귀가 특징인 바유돼지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중) 생선요리에 곁들여진 노르망디 소스 (사진 출처: www.pavillonfrance.fr)

(우) 노르망디의 시드르. (사진 출처: calvados-tourisme.co.uk)


전쟁의 핏바람과 인세의 무관심 속에서도 바유돼지가 살아남았듯이, 노르망디의 유제품 또한 질곡 많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크림빛의 진한 명맥을 이어나갔다. 예컨대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이즈니 버터(Isigny butter)'가 바로 노르망디 출신이다.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를 지닌 버터이기도 하다. 치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축에 속하는 까망베르(camembert) 또한 노르망디 출신이다크림은 또 어떠한가! 버터와 치즈가 발달한 지역의 크림이 맛이 없을 수가 없을터, 노르망디 지역의 크림은 일찍이 아름다운 상아빛과 벨벳 같은 부드러움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관개가 잘 되는 영양 많은 목초지를 축복으로 여겼던 노르망디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크림을 사용한 요리를 발달시켜왔다.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해산물, 채소와 달걀, 디저트 등 진하고 부드러운 크림이 어울리지 않을 재료가 없었다. 생선 벨루테 소스에 노르망디의 크림과 달걀, 버터를 넣어 만드는 노르망디 소스(sauce Normande; Normandy sauce)는 노르망디의 해안에서 잡히는 싱싱한 해산물에 잘 어울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


노르망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과이다. 매년 14~20kg의 사과를 섭취할 정도로 사과를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 중에서도, 이 고장의 사람들은 사과를 즐겨먹기로는 유난스러운 수준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에게 사과는 단순한 과일을 넘어선 의미를 가진다. 진한 크림과 더불어 요리를 만들면 그 부드러운 가운데 달달한 풍미 일품이고, 커스터드와 맛 좋은 버터, 아몬드를 듬뿍 넣어 사과 타르트를 만들어도 맛이 훌륭하다아예 사과 타르트 중 '노르망디 타르트(Tarte Normande)'라는 이름이 붙은 타르트가 있을 정도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과 타르트를 만들어왔던 걸까.


어디 타르트뿐이랴, 노르망디의 사과는 '시드르(cider)'라는 음료로 변신하여 크림의 풍미가 녹진한 노르망디의 테이블에 상큼함을 더하기도 한다. 사과의 종류에 따라 시드르의 맛도 달라진다. 달콤한 맛의 사과는 자연스러운 단맛의 시드르를, 산미가 강한 사과는 톡 쏘는 맛이 강한 시드르를, 씁쓸한 사과는 깊은 바디감이 있는 시드르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사과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거대하기 때문일까.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이지만 노르망디산의 와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포도로 만드는 와인 대신 사과를 숙성하여 만드는 '칼바도스(calvados)'를 즐긴다. 칼바도스는 사과를 이용해 만드는 브랜디의 일종이다. 이 칼바도스와 관련한 노르망디만의 전통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노르망디 구멍(le trou Normand; the Norman hole)'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 있다. 코스 요리 사이에 칼바도스 한 잔을 마심으로써 입맛을 돋우고 소화를 촉진하는 관습에 이토록 재치 있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제 당신이 노르망디의 부엌에 선 요리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무엇을 요리해보고 싶은가?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신선한 해산물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건강하게 자라난 돼지와 소, 오리, 우유 향 가득 진한 풍미의 크림과 버터,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사과와 시드르, 칼바도스 등. 어느 요리사가 이 중 서넛을 섞어 맛있는 요리를 내놓았다면, 그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맺어낸 결실과 자연이 주선한 만남 중 어느 쪽이라고 보아야 할까?


[참고한 레시피]

Chicken Apple and Cream Casserole - Vallee D'auge

https://www.youtube.com/watch?v=rTt8ovJqTao

돼지고기가 아니라 닭을 사용하는 레시피이지만 프랑스 사람이 직접 이끄는 레시피를 따라보고 싶었기에 이 동영상을 상당 부분 참고했다.



[포크 노르망디 재료]

<메인 재료>

- 돼지고기 0.8~1 kg (연한 안심도 좋고 기름기가 적당히 섞인 목살도 좋다. 삼겹살을 쓴다면 가장 바깥쪽의 기름기가 많은 부분을 다듬는 것이 좋다)

- 밀가루 6 tbsp 정도

- 버터 4 tbsp

- 치킨스톡(고형 큐브나 액체)

- 소금, 후추


<소스 재료>

- 양파 반 개 또는 1/2 컵

- 사과 1 개(사과의 양은 본인 취향껏 조절하면 된다)

- 칼바도스 또는 시드르(애플 사이다) 25 ml (칼바도스는 구하기 어렵지만 애플 사이다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대형마트에 가면 여러 국가에서 생산한 다양한 애플 사이다를 찾아볼 수 있다)

- 크림 150 ml

- 버터 6 tbsp


[포크 노르망디 조리법]

1. 양파를 잘게 썬다. 사과는 절반은 잘게 썰고 절반은 웨지 형태로 자른다.



2. 돼지고기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소금 후추 간을 하고 양면에 밀가루를 바른다.



3. 팬을 달군 후 버터를 두르고 (2)의 돼지의 겉면을 익힌다. 60~70 % 정도 익되 겉면이 노릇해질 수 있도록 중강 세기의 불에서 잠깐 익힌다.



4. (3)의 팬에 베이컨과 잘게 썬 양파를 넣고 양파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는다.



5. (4)의 팬에 시드르(또는 칼바도스)를 넣고 팬에 뭍은 갈색 잔여물을 닦아내듯이 시드르에 녹여낸다. 고형 치킨스톡을 시드르에 넣는다. 액체형 치킨스톡을 쓸 경우 농도 조절을 위해 시드르의 절반 정도가 남을 때까지 졸인 후 넣는다.



6. (5)에 크림을 넣고 중불~약한 불로 끓여 걸쭉하게 만든다.


7. (선택) 버터를 두른 팬에 웻지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넣어 노르스름하게 익힌다.

8. (6)에 겉면을 익힌 돼지고기, (7)의 사과 또는 웻지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넣고 돼지고기가 부드럽게 익은 정도가 될 때까지 익힌다. 지방이 적은 부위일수록 빨리 뻣뻣해지므로 살짝 덜 익었다 싶을 때 팬에서 덜어내면 식감이 적당하다. 소금, 후추 간을 본다.



노르망디의 가정식, 포크 알라 노르망디 완성!



노르망디 산 시드르를 사용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사용한 것은 아일랜드산의 'Magners' 사이다(cider)이다. 그래도 맛은 훌륭하다.



버터와 크림, 상큼한 사이다, 노릇하게 익은 돼지고기의 육즙이 어울린 소스의 맛이 기가 막히다. 잘게 썬 양파와 사과를 크림과 함께 숟가락 한가득 담아 싹싹 빨아먹고 싶을 정도이다.


돼지고기와 크림의 낯선 조합 덕에 느끼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요리를 맛본 첫 순간에 바로 사라져 버렸다. 크림이 들어간 고기 요리가 전혀 느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과일까, 사이다일까, 아니면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내는 생소함과 신기함 때문이었을까.



이 요리를 먹고 자랐을 노르망디 사람을 상상해본다.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한 조합이지만, 그에게는 어머니가 해주던 주말 특식 같은 요리가 아니었을까. 첫술을 떴을 때의 반응도 사뭇 다를 것이다. 나의 끄덕거림은 재료의 색다른 조합을 성공적으로 경험한 것에 만족을 느끼는 끄덕임이고, 그의 끄덕임은 머리와 마음이 기억하는 추억의 맛에 대한 인사와 같은 끄덕임이 아닐지. 사과와 크림, 돼지고기의 부드러운 만남은 노르망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다정한 일이기 때문에.




[참고한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Normandy

http://traveltips.usatoday.com/food-normandy-france-12841.html

https://www.weboucherie.fr/edito/viandes/porc/porc-de-bayeux

https://en.wikipedia.org/wiki/Calvados

https://www.saveur.com/normandy-france-apples-calvados

https://www.petitfute.com/r15-normandie/guide-touristique/c65123-la-normandie-gourmande.html

http://blog.discoverfrance.com/normandys-foods/

http://kr.france.fr/ko/discover/29086

https://namu.wiki/w/%EB%85%B8%EB%A5%B4%EB%A7%9D%EB%94%94%20%EC%83%81%EB%A5%99%EC%9E%91%EC%A0%84#s-4.2.2

https://en.wikipedia.org/wiki/Omaha_Beach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A._Taylor

https://www.thespruce.com/normandy-sauce-recipe-99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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