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녁식사의 의미
대학생 시절이 마냥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갈비뼈 안쪽 어느 한 구석이 말랑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연애, 친구, 가족, 여행, 아르바이트 등의 다채로운 기억은 아픈 기억이든 기쁜 기억이든 간에 흐릿한 셀로판지를 덧댄 마냥 추억의 냄새가 덧씌워져 버렸다. 수업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과제와 시험에 치여가며 허덕이며 들었던 수업이더라도,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사소한 어려움은 탈색되어버리고 연한 미색의 아련함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2학년 1학기, 대학에 와서 처음 들은 내 첫 영어회화 강의를 맡은 교수님은 영국인이었다. 졸업한 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그 수업을 워낙 좋아했던 탓에 그 이름과 얼굴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 밖에 기억나는 것들은 한국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놀 때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때의 그 표정, 초보 영어화자들을 배려하여 또박또박 발음을 해주던 그 말버릇 같은 것이다. 결국 수년이 지나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공들여 외운 교과서의 영어단어와 문장이 아니라 그 주변부의 것들이었다.
시간에 퇴색하지 않은 그다음의 기억은 바로 그가 수업시간에 들려준 노래들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 노래를 소개할 때면 유독 반짝이던 그 눈빛이 바로 그 증거였다.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만 선별해서 우리에게 공유하는 일에 나름의 재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조니 캐쉬, 앨라니스 모리셋, 레이 찰스, 사이먼 앤 가펑클... 그렇게 수업 중간중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던 노래가 많았건만, 유독 왜 이 노래가 내 기억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이 노래를 소개하던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더 진지해서였을까.
노래의 제목은 "Last Boat Leaving"이다. 번역을 하자면 "떠나가는 마지막 배" 정도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는 "She"라는 제목의 노래로 잘 알려진 영국 출신의 가수,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의 노래이다. "She~ may be the face I can't forget"으로 시작하는, 영화 노팅힐에 나왔던 그 노래말이다. "Last Boat Leaving"은 그가 1989년 발매한 앨범, "Spike"에 마지막 순서로 수록되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노래의 가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가사를 통해 드러난 이야기라고나 할까. 배가 떠난다니, 어디에서 어디로? 엘비스 코스텔로가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라는 사실이 이 노래가 그리고 있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Last Boat Leaving/Elvis Costello_21.November.1987@Tokyo
https://www.youtube.com/watch?v=mnCGVtYIFWA
Last Boat Leaving
Hush, my little one, don't cry so.
쉿, 그렇게 울지 마라 내 아가.
You know your daddy's bound to go
아버지가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니.
They took his pride. They took his voice.
그들은 그의 자긍심과 목소리를 가져갔지.
Don't upset him now, don't make a noise
그를 화나게 하지 말거라,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They said "You're lucky son you've still got a choice"
그들이 말한단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당신은 행운아"라고.
Last boat leaving
"마지막 배요!"
Don't waste your tears
눈물을 낭비하지 말거라
It's not as if I'm in chains
묶여서 가는 것은 아니란다.
I don't want to go now,
너를 떠나고 싶지 않지만,
it would be better for you, too, if I don't look back when we sail
떠날 때 내가 돌아보지 않는 게 너에게 더 좋을 것 같구나.
Hush my dear, while I whisper it in your ear
쉿, 아가야. 내가 너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만
We're not going to sail tonight
우리는 오늘 밤 항해하는 게 아니란다.
We're going to disappear
우리는 사라질 거야.
And it feels like a punishment, but I don't know what for
그리고 그건 마치 형벌과도 같구나. 대체 뭘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을 뿐.
Take care of your mother, son, it's you that she adores
어머니를 잘 돌보거라 아들아. 그녀가 진정으로 아끼는 것은 바로 너란다.
'Cos no matter how long we sail we'll never reach the shore
얼마나 오래 항해하든 우리는 결코 육지에 닿지 못할 테니까.
Last boat leaving
"마지막 배입니다!"
So dry your tears. It's not as if I'm in chains
눈물을 닦으렴, 묶여서 가는 것도 아닌데.
When you go to school, son, you'll read my story in history books
네가 학교에 간다면 너는 나의 이야기를 역사책에서 보게 될 거다.
Only they won't mention my name
다만 그들이 내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지.
So hush now, my darling, my sweet little one
그러니 이제, 내 사랑, 내 아가야.
I hope that you never have to do what I've done
내가 했던 일들을 네가 해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Do you know what I've done?
너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Why I'm going away?
내가 왜 멀리 떠나는지,
On the last boat leaving this stinking town
이 썩은 내 나는 도시를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타고서
It's the last boat leaving, it's the last boat leaving
"마지막 배요, 마지막 배입니다"
You've had my innocence, you've had my heartbreak
너희는 나의 순수와 비탄을 가져갔고
You've taken the place where I once belonged
내가 한 때 속했던 곳을 빼았았으니
Now what more can you take?
내게서 앗아갈 것이 더 무엇이 남았는가.
나의 영국인 선생님은 노래의 가사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단지 이 노래는 고향을 떠나는 아일랜드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그리고 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당시 가사를 곱씹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사회시간에 배운 아일랜드의 대기근(Great Famine, 1845~1852)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딱 이 정도였다. 예로부터 척박했던 아일랜드 땅의 농민들은 쉽게 잘 자라는 감자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감자 역병이 돌아 감자가 제대로 수확되지 않기 시작했다. 당시 아일랜드인은 한 종류의 감자만 재배하였고, 이 감자는 역병에 취약한 종이었기 때문에 피해는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아일랜드를 식민지로서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아일랜드의 기근에 무관심하였고 빈곤과 아사를 피해 많은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은근슬쩍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선생님의 언급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사회시간이 아니라 생물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
교과서에 나타난 설명은 한 문단의 길이로 압축된 토막 정보였다. 나중에 새로이 알게 된 것은 주로 하나 하나 묵직한 무게를 지닌 '숫자'들이다. 1800년대 중반 당시 아일랜드인은 대부분 소작농의 삶을 살고 있었다. 25%에 못 미치는 인구가 90%에 육박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자의 도래 이전의 아일랜드인들은 육류와 버터, 보리 등의 곡물을 주된 식량으로 삼았으나, 영국에 의한 식민지배가 시작되고 나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영국인이 선호하는 육류와 버터는 대부분 수출품으로 분류되어 아일랜드 땅을 떠났고, 저임금에 시달리던 소작농들은 빈 땅에 감자를 심어 이를 섭취하여 삶을 이어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840년대에는 아일랜드 인구 5분의 2가 철저히 감자에 의존하는 식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감자 역병이 퍼져나가자 생존에 직격탄을 맞기 시작한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영국 정부의 대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 초기에는 영국으로의 아일랜드 식량의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아일랜드 내의 식품 가격을 낮추는 것을 유도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를 기치로 하는 자유당이 집권하자 영국 정부는 모든 개입을 멈추고 시장의 원리에 사태를 그대로 맡겨 버렸다. 결과는 처참했다. 약 팔백만에 달하던 아일랜드의 인구 중 백만에서 백오십만 명이 기근을 피해 주변국과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미처 떠나지 못한 이들 중 약 백만 명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엄청난 수의 사망과 이민으로 인해 대기근 이후의 아일랜드 인구는 이전의 4분의 3 수준으로 급감하였다.
아일랜드 하면 감자 대기근만이 유독 강렬하게 떠올랐던 것은 사실 아일랜드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나는 "Last Boat Leaving"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19세기 중반의 감자 대기근을 떠올렸다.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나는 어느 아일랜드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가슴 찡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러한 추측은 조금 틀렸다. 엘비스 코스텔로 본인의 설명을 통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반박되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Last Boat Leaving"은 엘비스 코스텔로가 자신의 조부(패트릭)의 경험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다. 엘비스 코스텔로가 1952년생, 엘비스의 아버지가 1927년생이다. 엘비스의 조부라 할지라도 그의 시대는 19세기 중반의 대기근과는 시간적인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조부 패트릭은 고아이자 이민자 1세대로,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와 질병으로 차례로 사망하였다. 고아원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운 후 패트릭은 입대하여 1차 대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는 영국군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의 고향, 아일랜드로 향하여 아일랜드인들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17년에 아일랜드 반란군이 쏜 총에 맞아 퇴역하기까지, 그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영국 군인으로서 부활절 봉기(Irish Uprising, 1916)를 비롯한 숱한 반란을 목도하였다. 퇴역한 후에는 연주 실력을 살려 타이타닉의 후배뻘 되는 호화 여객선의 재즈 연주자로서 1933년까지 활동하였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아이러니에 놓이게 된 자신의 할아버지를 두고, 엘비스 코스텔로는 담백하게 말한다. "아마 자신의 아일랜드 친구들(his Irish mates)이 보내는 경고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랬을(총을 맡았을) 겁니다."
엘비스가 그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Last Boat Leaving"을 작곡했다면, 가사의 해석은 나의 해석과 크게 달라지게 된다. 굶어 죽어가는 가족과 이웃을 뒤로하고 희망을 찾아 홀로 먼 나라로 이주하는 아버지 대신, 물질적인 보상을 위해 아버지의 조국을 향해 총을 겨누러 가는 아일랜드인도 영국인도 아닌 어느 젊은이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했던 일들을 네가 해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 아느냐"라고 아들에게 던지는 아버지의 질문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추측이 틀려서 아쉬운 것보다도, 대기근 이후에 아일랜드인 또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들 앞에 고난과 고통의 역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 대기근과 부활절 봉기뿐이랴. 아일랜드 내전(1922~1923), 북아일랜드 문제, 경기침체 등 역사의 단면 어디에나 자식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아버지들이 존재했던 것을.
이번에 소개할 요리인 아이리시스튜(Irish stew)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요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름만 들어도 이 요리가 아일랜드인에게 아주 중요한 요리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한국 요리를 되돌아보아도 그렇다. 어디 '한국탕' 이니 '대한 찌개', '조선국' 같은 것이 있던가 말이다. 양고기(양고기가 여의치 않다면 최소한 소고기)가 들어가는 요리이기 때문에 동방의 먼 땅에서 이를 만들려는 이에게는 재료비 측면에서 다소 부담스러운 요리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이리시스튜는 화려하고 세련된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본디 아이리시스튜에 사용되는 고기는 질 좋은 어린 양(lamb)이나 소가 아닌 질기고 누린내가 강한 늙은 양(mutton)이다. 일조량이 적고 척박한 아일랜드 땅의 대부분은 농지가 아닌 목축지로 사용되었고, 이 구릉과 산지를 노다니며 아일랜드인들을 먹여 살린 것이 바로 이 양들이었다. 풀만 먹고도 잘 자라 양털과 젖을 제공하고, 늙어 죽을 무렵에는 양고기까지 선사하고 떠났으니 아일랜드인들에게는 고맙디 고마운 가축이었다. 늙어서 질긴 고기를 요리하기 위한 가장 간편하고 직관적인 방법이 바로 오래 끓이기(stewing)이었으니, 수명을 다한 양의 몸뚱이가 향할 곳은 화덕에 걸린 깊은 솥이었다.
척박한 유럽의 서쪽 끝 땅에 사는 농민들이 먹던 소박한 요리였기에, 아이리시스튜의 재료와 맛 또한 교묘한 술수와 복잡한 과정 없이 단순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다. 양고기 이외에 들어가는 재료는 양파와 감자, 당근 같은 뿌리채소 약간이 전부. 다채로운 풍미의 향신료도, 정교한 소스를 만드는 과정도 없다. 허브라고 해도 흔하디 흔한 로즈메리 약간이 전부. 유명한 기네스 맥주를 넣어 국물색을 진하게 만드는 레시피도 있지만 이는 현대에 새롭게 추가된 내용일 뿐 단순함의 극치인 아이리시스튜의 정체성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조리법이 단순하다고는 해도 요리가 지닌 가치와 의미를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운 법. 아니, 오히려 상류층의 요리가 아닌 서민의 요리일수록 당대의 사람들이 요리를 두고 느꼈을 감정을 묘사하기에 더욱 큰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굶주림과 전쟁, 이별과 죽음을 이웃하던 과거의 사람들. 그들이 제 몫을 다하고 죽은 양을 요리하고 이를 나누어먹을 때의 그 분위기를, 그 감사와 신성함을 감히 어찌 문단 하나 정도 길이의 문장들로 요약할 수 있을까. 일상의 잔 가지를 모두 쳐내고 그 뼈대만 남겨 한 나라의 역사를 한 문단 안에 넣고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교과서적인 서술. 그 아래 수북이 쌓인 잔가지와 잎새 사이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기쁨과 눈물이 겹겹이 눌러 담겨 있을까.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풍화되는 잎새 한 장 어딘가에 집을 떠나는 아버지들이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나누어먹었을 아이리시스튜가 있지는 않을까.
[아이리시스튜 재료]
소박한 서민요리라 할지언정, 고기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요리가 지닌 소중함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과거에도 그랬고 삶의 여건이 훨씬 개선된 지금도 그렇다. 아이리시스튜를 만든답시고 코스트코에 가서 소고기 한 덩이를 3만 원을 주고 샀는데, 못 먹을 비계와 근막을 손질하여 떼어내고 나니 중량의 20 퍼센트 정도는 버리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내가 아이리시스튜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소고기는 살치살로 약 600g 정도. 이 정도만 해도 벌써 1만 5천 원이다. 원래 양고기를 써야 하는 요리인데 왜 양고기를 쓰지 않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양고기는 너무너무 비싸다. 비싸디 비싼 소고기보다 훨씬 더 비싸다. 단지 그뿐이다.
- 양고기(주로 어깨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뼈채 사용하는 것이 더 깊은 맛이 난다고) 또는 소고기 1 kg (이지만 차마 1kg을 다 넣지는 못했다)
- 양파 1 개
- 감자 1.5 컵 또는 작은 감자 대여섯 개
- 당근 1 개
- 밀가루 1.5 tbsp
- 버터 1 tbsp
- 치킨스톡 육수로 3컵 또는 고형 큐브 하나에 물 3컵
- 소금, 후추, 로즈메리 약간, 식용유 약간
(재료의 양은 처음 만드는 이를 위한 추천사항일뿐 본인의 취향과 사정에 맞게 가감하면 된다)
[아이리시스튜 조리법]
1. 2~3 cm 정도의 두께로 손질한 소고기를 식용유를 두른 팬에 얹고 갈색빛이 돌 때까지 익힌다.
고기 굽기의 핵심은 예열. 스테인레스 팬을 잘 예열한 뒤 기름을 두르고, 팬의 온도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고기는 두 번 정도 나누어 굽는다.
2. 고기를 따로 덜어내고 손질한 양파를 넣고 갈색빛으로 익힌다. 양파에 갈색빛이 돌면 버터를 넣어서 녹인다.
3. 녹은 버터와 밀가루를 섞어가며 3분 정도 볶는다.
4. 치킨스톡 세 컵(고체 큐브를 사용한다면 큐브 하나와 물 세 컵)을 넣고 로즈메리를 약간 올린다.
5-1. (4)의 재료와 따로 덜어 둔 고기, 당근을 한 냄비에 옮겨 담고 1시간 동안 끓여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육수를 졸인다. 냄비 바닥에 재료가 눌어붙지 않도록 이따금 저어준다.
5-2. 또는, 냄비에 넣고 수시로 저어주는 과정이 귀찮다면 전기밥솥을 사용해봄직 하다. 감자와 소금, 후추를 제외한 모든 재료를 전기밥솥에 넣고 '찜' 기능을 이용해 40분에서 50분 동안 찐다.
6. 감자를 넣고 20분 정도 더 찐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밥솥에서 40분 동안 찐 고기는 조금 탄력이 남아있되 말랑하게 익었을 것이다. 여기서 감자를 넣고 20분을 더 쪄내면 포크만 대어도 술술 부서지는 아주 부드러운 상태가 된다.
아일랜드인들의 소울 푸드, 아이리시스튜 완성!
로즈메리와 후추 외에는 육향을 잡을만한 재료가 없기 때문에 소고기 향이 강하게 난다. 기분 나쁜 향은 아니고 은근히 식욕을 돋우는 향이다. 양고기였다면 이 향이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을 터. 촛불을 켜두고 식탁에 둘러앉아 오랜만의 만찬을 기다리던 아일랜드의 가족이 기다리던 향은 고기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로 이런 향이 아니었을까.
소고기는 이미 물러질 대로 물러져서 포크만 대어도 조각조각으로 으스러진다. 이가 아닌 혀로만 먹어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당근도, 감자도, 묵직한 고기 향이 담뿍 밴 채로 조그만 압력에도 부드럽게 무너져 내리기는 마찬가지.
밀가루가 들어가서 농도와 부피감이 진해진 육수에서는 연한 갈비찜 같은 풍미가 배어 나온다. 한국식으로 간장과 설탕으로 맛을 낸 양념은 없지만, 아마 입에 쩍쩍 달라붙는 양념을 걷어내고 나면 갈비찜의 뒤에도 이렇게 솔직한 고기 향이 우러나오는 단순한 맛이 숨죽이고 있지는 않을지.
말이 나온 김에 비교를 이어가자면 양념의 유무를 제외하면 아이리시 스튜는 한국의 갈비찜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는 요리이다. 유럽의 소고기 스튜요리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니쿠쟈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꽤나 알려져 있으나 갈비찜과 아이리시스튜의 직접적인 연결관계는 파악된 바가 없다. 오랜만에 엄마가 갈비찜을 만들어주시면, 솥에서 갈비가 익어가는 냄새에 근 한 시간은 부엌 주위를 어정어정 걸어 다니며 갈비찜은 언제 다 되냐고 자꾸 물어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이 아이리시스튜를 만드는 어머니 주변에 아이들이 있었다면 분명히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 점은 확실하다.
아이리시스튜를 먹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별해야 했던 가족들이 다시 한데 모여 따뜻한 아이리시스튜를 먹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기를 바라는, 그들이 겪어야 했을 슬픔과 아픔을 글로 배운 나. 아이리시스튜의 구수하고 솔직한 맛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과거의 이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자력이 있었다. 역사의 슬픈 단면에서 민중과 함께 했던 요리들. 그 요리가 지니는 기억의 무게를 어찌 한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참고한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Famine_(Ireland)#Death_toll
http://www.elviscostello.info/biography.php
http://www.elviscostello.info/faq/lyrics.php
http://elviscostello.info/phpBB3/viewtopic.php?t=2959
https://theculturetrip.com/europe/ireland/articles/a-brief-history-of-traditional-irish-stew/
https://en.wikipedia.org/wiki/Irish_st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