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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Dec 26. 2016

크리스마스에 감기 걸린 자취생에겐 그리스식 치킨수프를

레몬향이 감도는 부드러운 연노랑색 그리스식 치킨수프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연휴에 감기라니.

누가 들어도 딱한 사정의 이 자취생을 위해 수프를 끓여주기로 했다.


자취생이 절대로 걸려선 안되는 것이 바로 감기이다. 사실 감기고 장염이고 간에 뭐든 아프면 안된다. 그 이유는 아프면 돌보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 추운 겨울, 가스비 아까워 보일러 온도를 높이기는 겁이 나는데 머리는 지끈지끈 목은 칼칼 티슈도 다 떨어져 가는데 콧물은 줄줄줄. 티슈라도 떨어지면 한 몸 녹이던 전기장판에서 일어나 열탕에 들어갔다 나온 듯 어질어질한 머리를 하고서라도 혼자 편의점에 다녀와야하는 것이 바로 자취생의 숙명이다. 수면잠옷에 패딩에 어그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오면 집 앞은 하필이면 번화가라서 예쁘고 멋있게 잘 차려입은 건강한 시민들과 마주치기 마련이다. 나 빼고는 모두 건강하고 예쁘게 즐겁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일단 아프지 말아야 한다.


고향집에 가면 보통은 맛있는 것 먹고 잘 자고 푹 쉬다 오는 편인데, 올 겨울 초에 갔을 때는 시골의 찬 공기를 무시하고 이불을 조금 걷어찼다가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꽤나 심한 열감기였는데, 미련하고 둔한 자취생으로 살아온 몸인지라 처음에는 열이 있는 줄도 몰랐다. 어질어질하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한참을 누워있으니 그제서야 엄마가 "너 혹시 열이 있는 것 아니니?"하셨고, 열을 재 보니 무려 38도였다. 나는 그냥 내가 게을러서 일어나기 싫은 기분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열이 난 것을 본 엄마는 "오히려 서울에서 혼자 아픈 것 보다는, 엄마 앞에서 아픈 게 더 낫다"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고향집에서는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드려야 엄마가 걱정을 덜 하실 줄 알았는데, 부모님의 마음이란 얕은 내 생각으로는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거실 소파에 나를 눕히고 이마에 물수건을 하나 올려준 다음부터 엄마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머그컵에 물을 떠와 나에게 열감기약과 비타민을 먹였고, 저녁 준비를 미리 거의 다 해 놓은 상태였지만 나를 위한 특별식을 추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뜨끈하고 고소한 흰죽을 끓이면서 달걀을 풀어 부드러운 달걀말이를 준비했고, 죽은 그냥 먹으면 심심하다고 냉장고 안쪽에서 상큼한 마늘 장아찌와 오이지를 꺼내오셨다.


그날 오후는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멍한 정신에 티비를 보다가 노곤노곤 잠에 들었다. 가족들이 먼저 저녁식사를 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스르륵 잠이 깨서 식탁에 앉으니, 엄마는 "아픈 덴 잠이 최고다,"하시며 흰 죽을 데워서 나를 위해 남겨둔 달걀 말이에 장아찌와 오이지를 곁들여 주셨다.


몸이 아픈 것은 힘든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돌봄을 받는 그 순간을 기쁜 마음으로 즐겼던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엄마가 든든히 지켜주는 시골집에서 서울의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감기를 낫게 할 메뉴를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목이 칼칼한 목감기에는 따뜻한 음식이 최고이다.


엄마라면 흰쌀죽이나 뜨끈한 누룽지 같은 것을 끓여주시겠지만 나는 뭔가 다른 것에 도전하고 싶다. 책 제목으로도 유명한 미국인들의 위안음식 치킨 누들 수프를 끓여먹을까 했지만 '누들'이 들어간 것은 별로 당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날 터.


마침 며칠 전부터 유튜브에서 'Aki'라는 그리스인 쉐프의 레시피 동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보지 않은 목록 중에서 '그리스식 치킨 수프(Greek chicken soup)'을 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미국식 치킨 누들 수프의 멀건 국물과는 달리 연노랑의 뽀얀 국물 색도 마음에 든다. 집에 크림도 없는데 혹시 크림을 넣은 것인가 걱정했지만 동영상을 끝까지 보니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수프를 전채요리(starter)라 생각하지만 나는 메인요리(main course)라고 생각한다'라며 생쌀을 수프에 듬뿍 넣는 친근함까지!





Greek Chicken Soup | Akis Kitchen

https://www.youtube.com/watch?v=DVVEbgn6Khk

나에게 영감을 준 고마운 동영상. 요리사인 Aki도 참 멋있다. 전형적인 그리스 미남!



정확한 이름은 Avgolemono soupa. 달걀 노른자와 레몬을 섞은 'Avgolemono sauce'가 들어가서 먹음직스러운 연노랑빛이 돈다.


이 그리스식 수프를 흔한 치킨 수프와 차별화하는 것은 바로 노른자와 레몬으로 만드는 'Avgolemono 소스'가 들어간다는 것. Avgolemono소스는 달걀(노른자만을 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을 레몬을 비롯한 산에 섞어서 따뜻하게 데워서 만드는 소스이다. 수프를 진하게(thicken)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도르마(포도잎으로 만든 길쭉한 쌈)나 아티초크 같은 야채 위에 올려서 소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스파라거스 위에 올린 Avgolemono 소스 -출처:closetcooking.com



그리스뿐 아니라 터키, 이탈리아, 발칸 반도, 그리고 유대인 사이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소스라고 하는데 불려지는 이름은 나라와 민족마다 다르다. 하지만 기록물을 근거로 그 시초를 따져보면 아마도 유대인이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르마 위에 올린 Avgolemono 소스 - 출처: http://inthekitchenwithzoe.com



그리스의 어머니들이 아픈 자녀를 위해 끓여준다는 그 요리를 자취방으로 불러보았다.






재료.


-닭가슴살 3 덩이


원래는 닭 한 마리를 다 써서 뼈와 살을 발라낸 후, 닭뼈와 통후추, 월계수 잎 등을 넣고 닭육수를 먼저 끓이는 것이 기본인 레시피이다. 그러나 자취생이 국 하나 끓여먹겠다고 닭 한 마리를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냉동실에 있는 닭가슴살 3 덩이를 쓰고, 닭육수 맛은 어떻게는 그 안에서 해결해보기로 한다.


-양파 한 알

-당근 하나

-leek 한 줄기


leek은 대파와 닮았지만 맛은 미묘하게 다른, 한국에서는 잘 취급되지 않는 채소이다. leek도 없고 대파도 없었던 나는 냉장고에 얼려둔 샐러리를 사용하여 초록색을 더하기로 했다. 샐러리가 당근과 양파를 넣은 스프에 잘 어울리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샐러리향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 넣거나 과감하게 빼도 좋다. 샐러리를 넣으면 확실히 향이 깊어지는 효과가 있다.


-쌀 한 컵~두 컵 (취향껏)

밥을 넣어도 되긴 하지만 생쌀을 넣고 끓이는 것을 추천한다. 30분 정도 끓이면 쌀이 어느 정도 익는데, 잘 익은 밥과는 다른 약간 꼬들한 그 식감이 수프에 잘 어울리기 때문. 정 생쌀을 넣기 싫다면 밥은 수프를 거의 완성한 시점에서 더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수프가 아니라 죽을 만들게 될 것이다.


-월계수 잎, 통후추, 소금, 치킨 스톡 (월계수 잎은 없다면 생략)

-신선한 달걀 3 알과 레몬 두 알(레몬이 없다면 레몬즙도 OK)


대략적인 재료 사진. 당근 뒤에 있는 피망은 꼭 필요한 재료는 아니다.









요리과정.


1. 닭은 해동시킨 뒤 깍둑썰기하여 준비한다.


전자렌지로 급히 해동 시킬 때는 반드시 1분에 한번쯤은 뒤집어 가며 해동시키는 것이 좋다. 덜 녹았다고 가만히 두고 계속 돌리면 한쪽이 새하얗게 다 익을 것이다.



2. 깍둑썰기한 닭을 올리브유를 두른 냄비에 볶는다.


닭을 볶을 때 냄비에 이것저것 닭육수가 말라붙은 찌꺼기를 남기는 것이 좋다. 지방도 없고 뼈도 없어서 육수로 빼먹을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닭가슴살이지만, 이렇게라도 꼼수를 써서 닭맛 나는 육수를 만들어보려는 것.


냄비가 타지 않게 조심해서 갈색빛이 조금이라도 돌게 한다.





3. 냄비에 닭가슴살을 꺼내고, 그 냄비를 씻지말고 그대로 사용하여 깍둑썰기해서 준비한 채소(당근, 양파, leek 또는 샐러리)를 넣어서 잠시 볶는다.



4. 야채가 완전히 익지는 않은 상태에서 냄비에 물을 붓고 치킨스톡을 넣고 끓인다. 내가 사용한 것은 역시나 요리 좀 좋아하는 자취인의 필수품 고형 치킨스톡.





5. 야채를 넣으면서 쌀도 동시에 함께 넣어준다. 생쌀을 넣어주면 되는데, 나는 그리스인처럼 쿨하게 포장을 뜯은 그대로 촤라락 부을 수는 없어서 흐르는 물에 살짝 헹구고 넣었다.





6. 이제 따로 덜어둔 닭고기도 냄비에 도로 넣은 후에 뚜껑을 덮고 20~30분간 부드럽게 끓여주는데, 끓이는 시간의 기준은 아무래도 쌀이 익는 기준이다.


마음이 급하다면 중간중간 뚜껑을 열고 쌀이 얼마나 익었는 지 확인해도 무방하다.



쌀이 다 익었을까 하여 뚜껑을 열어보았다.



여기서 멈춘다면 평범한 치킨수프가 될 것이다.




밥보다는 꼬들하지만 식감이 괜찮다. 이 정도에서 핵심인 Avgolemono소스를 넣기로 한다.





7. Avgolemono 소스를 준비한다. 달걀 세 개를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여 준비한다.




잘 분리한 노른자에



레몬즙을 듬뿍 넣어준다. 레시피 동영상에서는 생 레몬 두 개를 갖고 제스트부터 즙까지 통째로 사용했으니, 인스턴트 레몬즙이나마 부족하지 않게 넉넉히 넣어준다.



고루 연노랑빛이 돌 때까지 잘 섞는다.



8. 이제 준비한 Avgolemono소스를 수프와 섞을 차례.


성급하게 바로 냄비에 넣었다가는 단단하게 익을 계란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계란국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영상의 Aki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다. 노른자와 레몬을 섞을 볼에 아직 뜨거운 수프 국물을 세 스푼 정도 넣고 넣자마자 잘 섞어서 부드럽게 풀어준다. 달걀이 응고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이 과정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한다.



9. 냄비의 불을 끄고 잠시 기다렸다가 (8)에서 국물과 섞어서 충분히 풀어준 Avgolemono소스를 넣고 잘 풀어준다.


순간 국물의 색이 마법 같이 바나나우유처럼 보드란 색으로 변한다.






스페인에서 산 수프그릇에 담았더니 색이 꽤나 잘 어울린다.



먹기 전에 통후추를 솔솔 뿌리면 맛도 좋고 보기도 좋다.




연노랑 국물은 마치 크림을 섞은 것처럼 부드럽고 풍부한 질감이다. 달걀노른자를 세 개 넣었을 뿐인데, 소박한 치킨 수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 같은 느낌이다.



Avgolemono 소스는 단순히 수프의 색과 질감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레몬의 신맛이 수프의 맛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 자칫 밋밋하거나 느끼할 수 있는 치킨 수프이지만 상큼한 레몬의 향과 맛이 살아 있어서 그 맛이 다채롭다.





감기라는 몹쓸 녀석도 이 따뜻함과 부드러움 앞에서는 새삼 미안함을 느낄 정도이다.






아픈 사람을 생각하는 엄마들의 마음은 전 세계 공통인가보다.


Καλή όρεξη! (Kalí órek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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