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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구원하는 것

단상

by 청유

내가 싫은데,

또는 내 모습의 일부가 싫은데

그게 잘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건 싫은 것이 아니다.


간절함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냥, 고치기가 싫은 것이다.

사실 나는 변화를 원치 않는데

타의적인 의무감이 발생한 것이다.

주변을 의식해야 하므로,

꽤 신경 쓰이기 때문에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만

홀로 있는 내면의 나는 그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잘 인지가 되지 않는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장 외면에 있는 내면이 곧바로 항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살아오며 겪은 경험이 새겨진 층이 있고,

아득한 유년의 황량한 기억으로 만들어진 무의식이 있으며,

그보다 더 깊이

첫 숨을 뱉기도 전에 정해진 기질도 한 층을 메운다.



우리는

이 폭넓은 내면의 지층까지 뚫어

형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변화의 의무감이 생기고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도

내면에서 싫다 하면 바꿀 수 없다.


의무감과 필요성이 모두 있음에도

내면이 '싫음'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 문제를 둘러싼 다른 대안이 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안을 핑계라고 얕잡지 않음으로써

내면에 작은 존중을 표하고 싶다.

(그 대안이란 것에는

주변의 배려나

흘러가는 시간도 포함될 수 있다.)


대안이 사라지면

더 이상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기에

감정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생기지도 않고

오히려 담담해진다.

의무감은 의무가 되고

필요성은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때론 그 책임이란 것이

생사를 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먹고사는 문제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감정이란 것은 의외로 외면에 위치하고 있어서

대안이 사라짐으로써 강등된 내면의 선택을

겉으론 여전히 싫어할 것이며

그 또한 계기가 없이는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비단 불행할 일은 아니다.

내면의 질서는 늘 교란되기 마련이고,

어차피 우리의 얼굴은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5년을 아직 못 살아본 내 어린 딸도,

백 년을 사신 외할머니께서도,

사람구실을 한다면 가면을 쓴다.

우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내키지 않아도 가면을 써야 한다.

나 스스로에게도

그 가면이 진짜 나라고 믿도록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내면의 혼란과 충돌을 덮을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고마운 가면인가.



자아의 모순을 비탄하지 말았으면 한다.

둑이 없는 강물은 빗물에 범람할 것이다.

우리는 내면을 통제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흘러넘쳐 스스로를 삼키지 않도록
외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바꾸고 싶지 않은 자신을
무질서한 내면 속에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방종이 될 것이다.
감정의 작은 물결조차도 거대한 혼돈으로 변할 것이다.


가면은 겉치레가 아니다.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 잡힌 균형체이다.

내면의 불완전함이 혼란을 준다 해도

가면이 견고하다면 우리는 그 덕에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가면을 둑으로 삼아 주변에 생명이 살도록 해야 한다.

본래의 나를 잃는 것이 아닌,

내면을 보호하여 스스로 정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내 가면의 역할이다.





(이 글은, 왜 나는 말만 하고 시작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자아성찰의 글이다. 싫어하는 것과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며 사는 것을 반성하고자 했으나 반성의 행위가 유효할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그냥 조용히 덮고 눈앞만을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노력'이라고 간편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논리를 반대로 뒤집어 펼쳐낸 것에, 솔직히 큰 확신이 들진 않는다. 하지만 나를 견인해줄 것도 결국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므로 이 글 역시 나에게 도화선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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