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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Mar 31. 2023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막내가 유치원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가 되었다. 한 달 새 선생님께 전화를 5통이나 받았다. 정기 상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전에 이렇게나 받아본 것은 큰아이와 둘째아이 때도 없던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우리 막내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어서 적응기간이 길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전화는 양치하려고 줄 서 있는데 새치기를 했다는 이유였다.

퇴근하고 막내에게 물어보니 약간은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치약이 묻은 칫솔을 입에 넣고 있었더니 뱉어야 해서 선생님이 먼저 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민채야, 먼저해하고 양보해주셨어.”

양보라고 표현한다.

분명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민채가 다른 아이들을 앞질러 먼저 양치를 하려고 하는 규율을 어기고 새치기를 하는 아이였는데,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사람마다 자신의 시선으로 상황을 해석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먼저 줄서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앞질러 간 것은 분명 잘못이다.      


두 번째 전화는 이러했다.

“민채가 제가 잘못한 점을 지적하면 잘 안 들으려 해요. 어머님, 자꾸 시선을 피하고 외면해요. 혹시 집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을까요?”

집에서는 그런 걸 감지하지 못한 건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서 일 것이다.

“네, 선생님 관심 있게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전화까지는 민채가 유치원에 적응하는 것이 우당탕 적응 스토리로 보여 남편에게도 웃으며 선생님과의 통화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전화가 올 때부터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유치원과의 통화가 있었던 저녁 시간에는 아이에게 훈계를 했다. 아이는 낮 동안 있었던 일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걸 다시 끄집어내어 그때의 이야기로 혼을 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떠올려주는 엄마나 기억해내려는 아이나 둘 다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내 아이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는 하지만 사교육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아이들이 학원에서 집과는 다른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하기에 자부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아이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급적 객관적인 눈으로 내 아이를 바라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내 아이에 대한 평가에서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막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유치원에 들어가서 5살 때부터 적응하던 친구들과는 차이가 날 것이다.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고도 생각한다. 여기에 부모가 어디까지 개입을 할 수 있느냐는 참으로 고민되는 부분이다. 할 수 있는 부분은 가정교육을 조금 더 신경쓰는 것일 게다.      


다섯 번째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이런 내용이었다.

점심을 먹고 양치할 시간이었다. 정리바구니에서 양치컵을 직접 꺼내오는 과정에 손에 걸려 바구니가 삐뚤어졌다고 한다. 막내에게 다시 제대로 하고 오라고 했는데 외면했다고 한다.

두 번 째, 세 번째, 네 번째, 제대로 하고 와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막내.  

한 발짝 물러서서 있었더니 선생님이 안 보는 틈에 조용히 가서 바구니를 정리하고 왔다고 한다.

‘스스로 하는 방법과 단체생활의 규칙을 정확히 알려주심에 감사하다.’

이성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감성은 이미 말로 표현되었다.

“선생님, 그런데 3월 신입생 중...., 민채가 가장 문제행동을 많이 하는 아이일까요?”

순화해서 이야기한다는 게 감정이 앞서다보니 직설적으로 뱉어버렸다. 당황한 선생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셨다.

“그럼, 다행입니다. 앞으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꼭 좋아질 거에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집에서도 더욱 신경쓰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이들과 함께하는 현장에 있다보니 여러 교육자들을 보며 내 모습과 대조시켜보는 버릇이 있다.

‘나라면,,,,나라면....,,아마 나였다면....’     

분명 두 번 정도 이야기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몸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거야? 알았지? 앞으로는 민채가 이렇게 해보는 거야.”하고 말이다.     

여러 통의 전화를 받으며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챙기고 있다는 것은 느껴진다.

그런데도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같이 해주셨다면 어땠을까?

바구니가 삐뚤어진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끔 아이들은 진짜 몰라서 의도치 않게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중에도 민채와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이 있다. 별거 아닌 것에 자존심을 부린다. 외면하는 것은 두려워서 일 것이다. 말을 안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그런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반항으로 본다. 그럴 때 교사가 더 가르치려 들면 이미 시작된 자존심버티기가 끝이 없어진다. 끝내 사소한 일이 크게 번져 예전에 있었던 일까지 끄집어내 아이를 훈계하게 된다. 교육의 본질이 흐려지는 순간이다. 교육의 의미는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성향에 맞는 교육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아이들은 같을 수는 없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이들을 바라보면 성향에 따라 교육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냐는 중요하다.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면 가르쳐줘야 할 것이 투성인 미성숙한 존재로 보인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는 의욕이 아이들의 단점을 부각시킨다. 하면 잘못된 점과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들만 눈에 띈다.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아이의 좋은 점이 먼저 눈에 띈다. 저 아이는 저런 점이 있구나.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는 다르게 이렇게도 행동하는 구나. 아이들은 나에게 모두 스승이다.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어떻게 하면 아이의 장점을 부각시켜주면서 고쳤으면 하는 행동을 개선해줄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해준다. 여러 상황들이 모두 공부가 된다.


그동안 경험했던 친구들이 그래서 지금은 나에게 값진 보물이다.

어떤 어머님 한 분이 오셔서, “제 아이 때문에 힘드실지도 모르겠어요. 경험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머니, 제가 경험하면서 판단할게요.”

아이는 어머님이 생각하신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질문이 많은 건 호기심이 많아서이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건 잘 몰라서이다. 여러 친구들을 경험하면 배우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조차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여전히 배우며 수정해가며 커가는 중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거나 가르쳐주기 전에 잠시 머뭇거릴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초점이 어디로 향해 있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달리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같은 모습, 성향의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나와도 다르다. 틀린 게 아닌, 다른 존재다. 다르기 때문에 틀리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장점이 가려진다.


가르쳐야 할 대상, 개선해줘야 하는 미숙한 존재가 아닌, 나에게도 스승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면 작은 생명들에게 배울 점이 가득하고 좋은 점이 먼저 보인다.           



갑자기 글을 마무리 하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에 오해의 소지가 없길,

지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우리 동네 최고이다. 훌륭한 교육 마인드를 갖추신 원장님과 선생님에 반해 이곳만 지원했다. 우당탕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하길 기도하며,

선생님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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