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 강박증 엄마와 살고 있습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하얗고 높은 등대 앞을 지나야 한다.
등대가 있어서 내가 사는 동네도 그냥 등대라고 불렸다.
어린 기억에 등대는 나의 아지트이자 놀이터였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은 아이들이 뛰어놀기 충분한 너른 마당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 등대앞을 지나가 본 적은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여서 그랬을 것이다.
먼 바다를 훤히 비춰주는 기다란 불빛을 보았다면 등대는 단순한 놀이터가 아닌 조금 더 아름다운 공간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바다의 등불 등대는 실상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 사람들의 삶은 환하게 비춰주지 못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등대의 불빛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등댓불의 영역은 우리 동네가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는 놀이터와 같은 마당이 있는 길쭉하고 요상하게 생긴 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까지 그곳 등대에서 생활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4. 5살 때쯤 항구 가까이에 살다가 산꼭대기 등대로 올라간 것 같다.
4. 5살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유난히도 빨간색의 대문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대청마루. 그리고 한 지붕 아래 많은 사람들.
빨간 대문 안에 사는 사람은 우리 가족만이 아니었다.
주인집 딸아이와 매일같이 집주인이 누구냐를 가리며 싸움질을 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이사를 갔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쫓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경상북도 포항 출신의 아버지는 결혼하고 신혼집을 할머니댁 근처로 잡았다고 한다. 어린 형제들과 어머니의 등살에 못이겨 야반도주하듯 만 원 짜리 달랑 한 장 들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강원도 바닷가마을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친인척 한 명 없는 곳에서 바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선원 자리였다. 해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이력과 기계들을 잘 다루던 아빠의 실력으로 몇 해 일하지 않고 바로 기관장 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나의 기억 속에 아빠는 몇 달에 한 번씩 외국 과자와 인형들을 들고 오는 반가운 손님이다.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서 한번 나가면 몇 달이 걸린다는 것을 어느 정도 커서야 알게 되었다.
이사 온 등대의 집은 항구 근처의 단칸방보다 조금 더 컸다. 4, 5살 때 이사 온 이후로 초등학교 2학년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갈 때까지 산 아래의 마을에 내려가 본 기억이 없다.
등대의 언덕배기 집에서 아랫마을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끔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단숨에 올라오지 못했다. 쉬기를 여러 번, 숨 고르기를 두어 번 해야 집에 다달랐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정수리만 보다가 몇십 분이 지나면 비로소 정면 얼굴을 볼 수 있다.
기억상으로는 집에서 학교까지 꽤나 멀었다. 가는 길에 소도 보고, 등대에 잠시 머물러 쉬었다 가고, 네잎 클로바도 찾고, 한 지붕 아래에 살던 또래들과 히히낙낙하며 한참을 걸어갔던 것 같다. 엄마 말로는 어린 나이여서 짧은 다리로 걷느라 먼 거리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라고.
기억을 더듬어 20대 때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으러 올라간 적이 있다. 이승기씨가 나오는 드라마 한 편의 영향으로 그곳은 더이상 못사는 동네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브이를 그리고 사진찍기 바쁘고 하얀색과 파란색 페인트칠이 되어진 층층이 집들이 그리스의 어느 마을을 연상케 했다.
어릴 적 기억의 등대는 없었다.
등대에서의 기억은 엄마에게는 가난이다.
등대=가난
그곳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이야기는 엄마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어린 아이 셋을 두고 아버지는 오징어 원양어선을, 젊은 엄마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명태배따는 일을 하러 다녔다. 배를 따고 남은 곤지며 창자를 얻어와 찌개를 끓여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가난 한 집에 그나마 큰딸은 씩씩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그늘진 모습 하나 없이 골목마다 대장노릇을 하고 다닌다.
“유진이 엄마~~~~, 좀 나와봐요.”
그늘 없다 못해 너무나도 해맑은 큰딸이 누군가를 또 괴롭혔구나 싶어, 이웃 엄마들이 부르는 소리에는 지레 겁부터 났다고 하신다.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닭싸움, 씨름, 줄다리기, 어느 것 하나 지고 오는 게 없는 장사 딸. 자랑거리가 없을 때 겨우 나오는 자랑 중의 하급 자랑거리다.
가난은 어린 아이조차도 빨리 철들게 한다.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