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강박증 엄마와 살고 있습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시대극에서 볼만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친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가끔 들어서 어느 정도 알았지만 외가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기에 우연히 들은 엄마의 어린 시절은 귀를 사로잡았다.
경상북도 문경시가 본가인 고씨 집의 넷째 딸로 태어난 엄마는 몸이 허약한 아이로 태어났다. 팔다리가 앙상하고, 먹는 대로 토를 하는 알 수 없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영양이 부실한 탓에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어, 엉금엉금 기어서 밥을 먹으러 나오거나. 더듬더듬 집안을 돌아다니며 생활했다고 한다. 용하다는 무당은 모두 찾아가 봤지만 묘수는 없었다. 엄마가 태어나 외할아버지가 하시던 사업도 더 잘 되고 살림이 더 일어 복덩이가 태어났다며 좋아하던 외할머니도 조금씩 지쳐갈 때쯤이다. 친구들이 함께 놀자는 말에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넷째딸은 더듬거리며 친구들 뒤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는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분명 시간을 많이 흐른 것 같더란다. 가까운 집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잠깐 잠이 들었다. 배가 고파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니 항아리 하나가 있어 열어보았다. 손을 넣어 봤더니 무언가 물커덩, 냄새를 맡아보니 달콤, 꿀이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기 시작하던 것이 어느새, 한 움큼씩 쥐어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싹싹 비웠다. 그리고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는 알 수 없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영자야~~, 영자야~~.”하는 외할머니와 가족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어났더니 온몸이 진득한 진액으로 덮여 있었다. 피부에 덮여 있는 것이 분명 잠들기 전에 먹었던 꿀처럼 진득진득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때의 기억을 말하시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진짜 꿀이었던 것같다고 한다. 꿀을 제대로 먹으면 약이 된다는 어른들의 말이 있는데, 그 꿀이 엄마에게 통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보이지 않던 시력도 조금씩 좋아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의 앙상한 다리에도 살이 차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딸이 건강을 되찾았으니, 얼마나 귀하게 키우셨을까. 엄마는 지금도 어릴 때 대접받고 귀하게 컸던 기억을 하고 계신다.
외할아버지는 당시 큰 사업가였다. 우리나라에 00피아노와 위스키를 처음으로 들여오신 분이시라고 한다. 엄마의 기억으로는 어린 시절에 잠시, 청와대 근처에 살았던 기억도 난다고 하신다. 몇 해 전 청운동이라는 동네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청와대의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그 주변에 청운동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 동네를 한 번 데리고 가 달라고 하셔서 모시고 갔더니, 기억의 조각을 맞추시며 동네 한 가운데 한참을 서 있다가 오셨다. 기억 속에 있던 그 장군님집도, 예쁜 기생언니들이 즐비했던 요정도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고스란히 떠오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때의 귀한 부잣집 넷째 딸 ‘영자’였다.
엄마의 수집품들을 가만히 들여가 보면 부잣집에서나 사용했을 듯한 근현대사의 물건이 많다. 자개농, 놋그릇, 소반, 백자, 병풍....
엄마는 어쩌면 그때의 기억을 다시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