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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Feb 05. 2024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비밀

인생은 정극이 아닌 코미디1

입춘, 봄의 시작을 알리듯 51년 만에 찾아온 따뜻한 기온의 날씨는 마음마저 살랑이게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을 갈까 하다가 도서관에 가서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김영하 소설가의 작품을 몇 개 더 읽자고 마음먹었다. 봄을 맞이하는 가장 좋아하는 일로 시작하고 싶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좋다. 가끔 들려오는 정적을 깨는 재채기 소리마저 도서관과 일부처럼 느껴진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엄마에게 연락이 온다. 막내가 이제 잠에서 깼다는 문자다. 밤늦게 들어온 엄마 소리에 잠이 깨어 밤새 뒤척이더니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잤다. 읽다 만 책과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더 빌려서 도서관을 나선다.           


집에 들어서니 막내가 한달음에 뛰어온다.

 "엄마, 어디 갔다 왔어?“

 "누나, 형하고 도서관에 있었어."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막내는 매일같이 반갑게 맞아준다.

 "옷 갈아입고 올게." 


뒤돌아서서 안방으로 향하던 그때, 베란다 앞에 걸려 있는 머플러 하나를 발견한다. 회색 빛깔에 주름이 잔뜩 잡힌 겨울 소재의 머플러다. '누구 꺼지?' 가까이 다가가 본다. 눈을 의심한다. 구깃한 울 머플러 끝자락에 보이는 선명한 글귀. 'FENDI', 펜디. 

"악~." 외마디 비명, 크게 지른 소리에 놀란 엄마가 부엌에서 허겁지겁 나오시며 물으신다.

 "무슨 일이야?" 

"엄마~~~~~~~~~~, 이..이..이..이거 왜 저렇게 됐어요? 누가 건조기에 돌렸어요?" 

"민서 아빠가 그랬어." 

"민서 아빠가 왜? 도대체.“

 "방에서 빨랫감을 잔뜩 가져나오더니 빨더라고." 안방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남편이 있어서다.      

닫혀있는 안방 문을 열어 재치고, 넷플릭스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는 남편에게 

"오빠, 머플러 오빠가 저렇게 해놨어?" 

"어, 깨끗하게 빨아주려고 했지.“

 "저걸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기에 돌리면 어쩌냐!! 어쩔 거야. 저거.“

 "내가 드라이 클리닉 맡겨줄게.“

 "그걸로 해결이 안 된 것 같아. 완전히 망가졌어." 

"될 거야."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시선은 테블릿 화면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상한 머플러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더 화가 난다.     


방에서 나오는 나에게 엄마가 묻는다. 

"민서 아빠가 뭐래?" 

"깨끗이 빨아주려고 그랬대. 저게 돈이 얼마인데."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명품 머플러다. 머플러는 3만 원을 넘겨 사본 적이 없다. 

"민서 아빠한테 하나 더 사달라고 해.“

 "안 돼. 아니, 안 사줘." 

민서 아빠, 그러니 남편은 그런 거에 돈 쓰는 걸 매우 아까워한다. 



"본인이 사줬으니, 비슷한 걸로 하나 더 사줄 수도 있지." 

"그게 아니고, 엄마. 다른 오빠가 사준 거란 말이야. 결혼 전에." 이성보다 말이 앞섰다. 

밝혀진 비밀. 

"그때 그 오빠가 사준 건데, 아우, 진짜." 엄마는 다소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신다. 안방을 한 번 쳐다보신다. 혹시나 들렸을까싶어.      



정적이 흐르는 어색함에 화살을 다시 남편에게 돌려본다. 안방을 향해, "민서 아빠를 확 펜디?" 

웃지 못할 상황에서 결국 장르는 코미디로 마무리 짓는다. 화가 나면서도 상황의 우스꽝스러움에 웃음을 터뜨리며, 추억으로 남기기로 한다. 그 오빠도 이제 진짜 보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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