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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Jun 06. 2024

고추장을 들고 튀어라.

 나보다 갱년기를 먼저 맞이한 남편 관찰일기3

      

    

”정말 감사드려요. 도와주신 덕에 작년에 비해 직원수도 많이 늘고, 회사가 커졌네요. “

”아... 네.. 그런데, 누구신지. “

얼핏 봐도 연예인 뺨치는 미모의 여성이 새하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잠시 후, 남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정말 감사드려요. 권 부장님 덕분입니다. “

”아... 저희 남편이... 호호, 네 잘 됐네요. “

’이 인간이 어디서 또 오지랖을 부리고 다니냐, 자기 밥그릇은 안 챙기고 맨날 남 일만 앞장서는 못 말리는 인간.‘

어색한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봐도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이 분위기를 못 견뎌한다. 애써 사회적으로 학습된 웃는 얼굴로 

”그럼, 전 이만. “하고 그 자리를 허둥지둥 벗어난다.      




몇 발걸음을 걷자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오빠, 어떤 여자랑 남자가 무지 고마워하더라. 덕분에 회사가 컸다고. “ 눈을 흘겨본다.

”아. 그래? 뭐... “

”.............. “     

그런데 어디선가 싸한 느낌이 든다. 아까부터 누군가 우리를 지켜본다. 

빨간 소형차 한 대가 선다. 얼핏 본 차 안에는 험상궂은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차에 자꾸 시선이 간다. 

남자는 조수석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날카롭게 섬뜩한 무언가를 꺼낸다. 

순간, ’이건 칼이다.‘ 싶었다. 

”오빠. “

”어? “

”뛰어. “

”뭐라고? “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라고. 어서!!!! “

슬리퍼를 신은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은 표정으로 뛰기 시작한다. 슬리퍼를 신은 나보다 느린 남편. 안 되겠다 싶어 손을 잡아 끈다. 

”있는 힘껏 뛰라고,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쫓아오고 있는 건 확실하다.      




밝은 불빛의 GS편의점이 보인다. 늦은 시간까지 동네를 환하게 해주는 곳은 역시 편의점뿐이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도와달라고 호소할까 싶었지만, 왠지 피해를 줄 것 같아 조금 더 뛰어보기로 했다. 300미터만 더 뛰면 경찰서가 있다. 

그런데 오늘따라 경찰서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집 앞 경찰서는 걸어서도 5분이 안 걸리는데 뛰어도 뛰어도 경찰서가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명의 여성이 함께 뛰고 있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그들과 있는 힘껏 달렸다. 남편이 뒤쳐질세라 왼손에 힘을 더 주어 꽉 쥔 채로 뛰었다. 

’ 평소에 살 좀 빼라니깐. 이러니 달리기도 못하지.‘

공포스럽고 다급한 상황에 이런 생각이라니,     

달리던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말한다. 

”이거 받으세요. “

”네? “

어느새 내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다. 

고추장통!

’이 걸 왜...‘ 싶었지만 더 말을 하다가는 숨이 차오를 것 같다. 

몇 발짝만 더 뛰면 경찰서다.      

경찰서 문을 다급하게 열었다. 아니 열어젖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거칠게 열고 뛰어들어갔다. 두 명의 여자도 뒤이어 들어온다.      

”헉,, 헉.. 헉... 경창관님... 저기.. 저.. “

숨이 차서 말이 쉽게 안 나온다. 혀가 굳은 것처럼 입 밖으로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같이 뛰어온 여자 중 한 명이 말한다. 

”경찰관님, 이거 드셔보세요. 이거, 귀한 도라지를 넣어서 숙성시킨 고추장이에요. “

이 상황에 고추장이라니 너무나도 기가 막혀 여자를 쳐다본다. 

고추장 뚜껑을 열어 경찰관에게 한 술 건넨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게 뭐냐고??     




꿈이다.      

오늘 새벽 꾼 꿈이다.      

아침 출근 전 고추장호박찌개를 우적우적 먹던 남편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혔나 보다. 

고추장을 들고뛰는 다급한 장면이 꿈으로 나오다니.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0분,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현실에서도 뜀박질을 한 것처럼 심장이 뛰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마음을 추슬려본다.      

한 시간 뒤 남편이 방에서 나온다. 

어제보다 한 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간다. 

뚜딱뚜딱, 가벼운 손놀림으로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콧노래도 부른다.      

’다 나았나. 그 사이에?‘ 그럴 리는 없지만,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안심했다.     

”고추장 어딨어?“

”어???? 뭐 고추장??? “





손을 꼭 잡고 있는 힘껏 뜀박질을 한 것처럼 갱년기에서 이 남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고추장이 다소 코믹스러웠지만 간절함이 꿈으로 나왔나 보다. 

나는 이 남자를 구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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