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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Jun 07. 2024

인생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요.

나보다 먼저 갱년기를 보내고 있는 남편 관찰일기 4

    

”다녀올게요. “

휴일 오전 중에는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이나 근처 카페를 찾는다. 같이 가보자고 권해봤지만 숙취가 해소되지 않았는지 오전에는 좀 쉬고 싶다고 한다. 


주방 쪽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사들고 온 듯한 통닭봉투가 보인다. 닭집에서 술을 마시면 닭,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올 때는 만두, 술을 기분 좋게 마신 날에는 한 잔 더 해야 한다며 내가 마실 맥주를 봉투 가득 사 올 때도 있다. 아이들을 양치시키고 잠자리에 들만 하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곧 잠들려 하는 아이들을 깨운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봤다 싶더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 하시던 모습 그대로다. 

사위는 장인이 데리고 들어온다더니 어쩜 나이가 들어갈수록 장인어른이 하던 행동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흥이 올라서. 

그나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뒤라 그런지 한결 얼굴색이 좋다. 



결혼 초에는 잦은 회식에 많이 다퉜는데 지금은 일찍 들어오는 남편의 모습에 더 어색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하는 취미생활도 안 하는 남편의 스트레스 풀이는 ‘술자리’다.

그것도 결혼한 이래로 십여 년을 쭉 봐오던 같은 사람들. 누구 만나?라고 묻는 일은 진즉에 그만뒀다. 누군지 뻔하니깐. 

적극적이고 매사 주도적이며 활달할 것 같은 첫인상의 남편은 결혼하고 잘못 보았다는 것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좁은 인간관계, 트리플 A형답게 섬세하고 소심, MBTI 마저 나와는 반대의 성향, I.

한참을 잘못 본 거다. 속은 걸로 치면 남편도 마찬가지다. 여성스럽고 조곤조곤 속삭일 것 같은 내 모습에 반했다는데 결혼하고 한 달도 안 되어 회식 후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쿠션 날리기와 이단 옆차기를 보여주며 난리 치는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하는 표정을 보았다. 사람은 그래서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물론 몇 번 본모습으로도 쉽게 판단해서는 모른다. 물 속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사람 속은 오죽할까. 알 수 없다. 연애기간도 짧고 만남의 횟수도 적었던 우린 서로에게 제대로 속은 게 맞다. 


그래도 한 가지~!!

인성은 제대로 봤다. 그 사람도 나도. 자타공인 인성하면 나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정도인데, 이 남자도 오래 지켜보니 인성 하나는 제대로다. 남 속일 줄 모르고 예의 바르고, 어른들한테 잘하고, 그거면 됐다. 부부라는 게 사랑보다는 동반자로 오래 함께 해야 하는 관계이므로 인성적으로 맞는 사이라는 건 중요하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가 되어서도 가르침이 아닌 보여줌이 되어야 하는 인성의 갖춤은 사랑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진다. 

부부만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사랑을 먼저 찾아야겠지만 기혼자들은 모두 안다. 결혼이라는 게 당사자뿐 아니라 상대와 관련된 모든 세계를 끌어안는 과정이란 걸.           



피곤해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국경일에는 휴관이라는 걸 잊은 채 도서관으로 향했다가 허탕을 치고 평소 아지트로 삼던 카페로 갔다. 첫 손님. 

이 맛에 이곳에 온다. 늘 이곳에 가면 내가 첫 손님이다. 물론 오픈하자마자 들어가서이기도 하지만. 

곳곳이 독서하기 좋은 자리다. 다섯 계단 아래에 자리 잡은 1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면 집중이 잘 된다. 탁 트인 공간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천장이 높아서 인 것도 같다. 유현준교수의 말대로 높은 천장은 창의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는 머리가 닿을 듯 말듯한 다락이 안락해서 좋다고 하는데 눌려지는 느낌을 싫어해서 상하관계 확실한 직장생활도 힘겨워하는 나에게는 3미터 이상되는 높은 천장이 마음 편하다. 

집을 지으면 우리 집 천장은 평생 천장의 조명을 교체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지을 거다. 

글도 쓰고 수업 준비도 마치고 나니 세 시간 정도 흐른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 사이 테이블에 손님들로 가득하다. 언제 집에 갈 거냐고 묻는 아들에게 30분만 더 있다가 가자고 했다. 일만 하다가 일어나기에는 억울했나 보다. 분명 따뜻한 라떼로 받아 올라왔는데 아이스라떼가 되어버린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반 층 아래의 1층을 내려다본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은 청소기를 정리하고 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소기를 돌렸나 보다.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다. 

날씨도 좋고, 아직 시간은 점심때쯤 밖에 되지 않아 집 안에 박혀있다는 게 약간은 억울했다. 아이들 점심밥을 챙겨 먹이며 ”오빠? 임장갈래? “, ”어디? “

”그 왜 있잖아. 지난번에 내가 보고 싶다던 곳 말이야. 거기 주변을 좀 돌아보자. “

”음.... 난 별로 안 나가고 싶은데. “

”그러지 말고 가자. “

”음. “ 외마디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간다. 재촉하면 더 안 하는 성격이라 조용히 책을 읽으며 나오길 기다렸다. 30분 뒤 깨끗하게 씻고 환복까지 마친 남편이 나온다.

‘갈 거면서..’ 속으로 삼킨 말. ”가자. 차에 먼저 가 있을게, 천천히 나와. 오늘은 내가 운전대를 잡고 이리저리 핸들을 꺾어볼 테니 오빠는 조수석에서 아아나 마시며 풍경을 음미해 봐. “

5분 뒤 조수석에 올라탄 남편은 평소 습관대로 내 차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잔소리할 거 없을 거다. 그럴 줄 알고 청소했지.’

평소 혼자 타고 다니는 차 조수석에는 읽을 책이며 여분의 가방, 쌀쌀할 때마다 챙겨 입던 재킷까지 걸려있다. 다른 사람을 태울 일이 없으니 조수석은 내 짐칸이다. 오른손을 뻗으면 바로 짚고 싶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차 내부를 어지럽히는 걸 싫어하는 남편은 차문을 열면 바로 잔소리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그런 일이 없도록 미연에 방지해 두었다. 남편이 오기 전 조수석 물건들을 트렁크에 다 던져둔 거다.      

최근에 새로 생긴 도로를 따라 들어간다. 도심 속 시골이라 아직 덜 정비된 상태이지만 이 도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평소 궁금해했다. 네비도 맞추지 않고 오늘은 가고 싶은 방향대로 핸들을 꺾어보겠다고 했다. ”우와, 이곳에 이런 집이 있었어? 너무 예쁘다~~. “ 오버다 싶을 정도로 한 톤 올려 감탄해 본다.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비포장 도로가 나온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길이다. ”갈 수 있을까? 길이 있을까? “

최근 생기를 잃은 남편은 수도 없이 하는 나의 질문에 그저 한 박자 쉬고 짧게 대답한다. 

”있어. “

남편말을 믿고 끝까지 가본다. 생각지도 못한 동네로 이어진다. 

”오~~~!!!!! 이 길이 이곳으로 연결되는구나. “

여기서부터는 잘 아는 동네라 격앙된 목소리로 좋아했다.      




사실 처음 계획은 임장을 과장해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아라뱃길로 향하는 것이었다. 트렁크에는 늘 캠핑의자와 테이블을 싣고 다니기에 조용한 강가에 차를 두고 간이의자와 테이블을 펴보고 물멍을 하고 싶었다. 복잡한 남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역시나 길치인 나에게는 무리였다. 중간에 내비게이션을 맞추자니 목적지가 탈로 날 것 같아 그대로 앞으로 앞으로만 전진했더니 어느새 뱃길과는 반대 방향의 동네에 와 있었다.      

남편은 말 한마디 없이 주면 풍경만 바라본다.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디야? “

”어, 동네 한 바퀴 돌려고 나와있어요. “

”민채가 자꾸 어지럽다는데. “ 아침에 분명 괜찮았는데 이모가 사준 자장면을 급하게 먹고 체기가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괜찮은 장소가 있으면 커피라도 한 잔 하며 남편의 속내를 물어보려던 찰나였는데 곧장 내비게이션을 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중으로 집에 도착하지 못하겠다 싶어 네비가 알려주는 빠른 길로 집으로 향했다.


    

”어휴~~, 인생 참 뜻대로 되는 게 없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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