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친구의 생일에,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연말 연시에, 혹은 SNS에 사진을 올릴 때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자”는 문장이 빠짐없이 인사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라는 건 도대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서인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을 읽고 난 이후여서 그런가 문득문득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어설픈 정의내리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과거는 어떘는가. 혹은 앞으로는 행복할까. 그걸 정확히 짚어낼 수 있을까?
‘행복(幸福)’이라는 단어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행(幸)’과 ‘복(福)’. ‘행’은 다행할 ‘행’이기도 하고, 행운의 ‘행’이기도 하다. 흔히 ‘운 좋게도’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다. ‘복’은 더 뿌리 깊은 단어다.
이 두 글자를 보며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건 운 좋게도 나에게 주어진 복, 그러니까 스스로 애써 만들어나갔다기 보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 얹혀진 선물 같은 게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을 처음 진지하게 하게 된 건,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에서다.
아이를 키울 땐,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이유식을 만들며 밤새 재료준비하던 새벽, 기저귀를 갈다 도망가버린 아이를 따라 거실을 뛰던 아침,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울며 바닥을 구르던 날. 매일이 체력과 인내의 시험 같았다.
“도대체 언제 크냐, 언제 좀 편해지냐…”
어느새 그 아이들이 나보다 키가 커졌고, 내 손을 잡기보다 핸드폰을 더 오래 쥐고 있고, 나의 눈보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더 오래 본다.
더 이상 “엄마 이거 같이 해줘”라는 말도, “엄마 배고파”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방 안에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를 부르기보단 음악을 튼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편한 시간’이 왔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 걸까.
그 고된 육아의 시간들이, 사실은 내가 가장 가까이서 아이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성인이 되어 내 품을 떠날 날이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 정도 남았나보다.
나를 귀찮게 했던 그 울음소리가, 재잘거림, 매일 내게 기대어오던 그 작은 몸이, 다복한 복이었다는 걸 지나가고 나서야 알아차린다.
학창 시절도 마찬가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매일같이 생각했다.
“언제쯤 교복을 벗고 화장을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자유롭게 늦잠도 자고, 치마 길이로 혼나지 않을까.”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단발머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성인이 되는 것만이 해방이라고 믿었다. 꽃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마침내 성인이 되고 교복을 벗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이상하게도 교복을 입고 지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저릿하다.
하얀 와이셔츠,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치마, 서로를 끌어당기며 장난치는 모습이 그렇게 반짝일 수가 없다.
그때는, 그 시절이 그렇게 예쁠 줄 몰랐다.
교복을 입고 복도를 뛰던 시간, 친구들과 엉켜 웃던 점심시간, 종례 종이 울리면 마치 조국 해방된 사람들처럼 달려 나가던 하교길.
그 모든 순간이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다.
간혹 선생님들이 말했다.
“얘들아, 지금이 제일 행복한 거야.”
그 말은 늘 내 머릿속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조급함에 밀려 귓등으로 흘러갔다.
‘내일’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야 안다.
그때도 행복했었다는 걸.
행복은 그래서인지 늘 멀리 있다.
지나가고 나면 반짝이고, 멀어지고 나면 따뜻하다.
그 순간엔 잘 보이지 않는다.
힘들고 버겁고 지친 감정들이 앞을 가린다.
세월이 흐른 후, 기억을 더듬다보면 문득 떠오른다.
그때 참 좋았구나.
그때가 참 행복했구나.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의 고민과 피로 속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나는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오늘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때 참 행복했었네.” 할지도.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평범한 하루도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이 저녁도
나중에 돌아보면
어쩌면, 아주 깊은 복이었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이다. 행복하다.”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을
‘갈 행(行)’ 자가 들어간 단어처럼 살아간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때, 행복했었다”고.
*行福행복(가버린 복)이 아닌
*幸福행복(지금의 복)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말해보자. 지금 이 순간.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