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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May 22. 2022

파친코를 읽고 기억하다.

에피소드3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손유진입니다." 

한 교실에는 한국인과 중국인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남아시아, 유럽 친구들도 몇 보였지만 극소수였다. 

"하지메마실떼, 왕떼쓰(반가워요, 왕입니다.)" 중국친구의 특유의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옆자리 친구가 인사를 한다. "하지메마시떼, 유진데쓰. 요로시쿠오네가이시마쓰(반가워요, 유진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교과서 일본어로 정확히 인사를 나눴다. 

하루 4시간의 수업,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일본으로 떠나오기 직전 한국에서 마련한 어학전자사전을 펴놓고 선생님의 말씀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적었다. 이모부의 지원으로 온 어학원을 허투루 시간을 허비하며 다니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온 친구들 모두가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옆자리의 왕상(왕씨)는 상하이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늘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칠판에 적힌 단어를 보고 '오이시소-(맛있겠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심지어 '사루(원숭이)'라는 단어에 격하게 '오이시소-!!!!!'라고 해서 일본어선생님을 당황하게 한다. 

왕상은 1교시가 끝나갈 무렵부터 졸기 시작해서 급기야 수업을 마칠 때까지 단잠을 잔다. 익숙한 일인 듯 선생님이나 주변 친구들이 개의치 않는다. 몇차례 깨워도 보았지만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인 오빠가 소용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쉬는 시간이 되면 그제서야 일어나, 입학한지 얼마 안 된 나에게 말을 건다. 정중어가 아닌, 반말로. 초면부터.(중국인들은 일본어와 한국어의 존경어를 힘들어 한다고 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엔 다른 중국인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중국어를 알려 주겠다며 따라해보라 한다. 자신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면 자기들끼지 키득거리며 웃어댄다. 지금 생각하면 놀림감이 될 만한 말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왕상이 싫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우리 둘다 이방인이 아닌가. 국적은 다르지만 일시적으로 교집합이 되는 공감이 되는 그런 관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왕상은 밀항으로 일본으로 왔다고 했다. 브로커에서 얼마의 돈을 주고 어선을 타고 왔다는 이야기를 한 한국인 오빠에게 들었다. 일본에서 어학원을 다니는 것은 비자때문이고, 공부를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어학원수업을 마치면 밤늦게 까지 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전 수업내내 졸다가 일터로 향한 것이다. 그때 왕상의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거나 한 살 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모험을 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것은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용기가 부러웠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선뜻 주변의 한국유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대부분 나보다 한 두살 위이거나, 혹은 직장을 다니다가 오신 나이가 있으신 분들도 계셨다. 다행히  언니, 오빠들이 먼저 말을 건네주며 하원길도 동행해주어 어느정도 어학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특히 제주도에서 온 언니와 오빠들이 살갑게 챙겨주어 외롭지 않게 잘 다닐 수 있었다. 언니와 오빠들에게 일본생활에서 주의할 점, 그리고 어학원 내에서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꼼꼼히 알려주었다. 


그날도 매일 하던대로 맨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고 하원을 준비하던 때였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결석하며 간혹 교실에서 보이던 한 오빠가 말을 건네온다. 제주도 언니, 오빠가 알려주었던 조심해야 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괜찮아?"

"아....네...지금 괜찮아요."

만화에서 방금 튀어 나온 듯한 눈에 띄게 잘 생겼던 도준오빠, 일순간에 경계심은 사라졌다.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유학생들도 그 오빠가 왜 나에게 말을 거는지 모두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혹시 지금 아르바이트 하고 있어?"

"아니요. 일자리가 없어서요."

엊그제 제주도 언니, 오빠의 당부의 말이 떠올랐다. 어학원에서 주의해야할 몇몇 사람들은 유학생 신분으로 일해서는 안되는 곳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절대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일자리 하나 소개해주고 싶은데, 한 번 해볼래?"

"아......네.....감사합니다." 

잘 생긴 외모에 말투마저 조곤조곤 도준오빠, 나도 모르게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이번주 토요일, 오후 4시까지 거기로 와."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들고 찾아간 곳은, 오사카 내 한국인 마을, 츠루하시역 근처, 야키니쿠(한국식 고기구이집)거리였다. 

어학원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내 모습을 보고 도준오빠가 마마(식당여사장)에게 부탁했다는 사실. 도준오빠가 두번째로 소개해준 무역회사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작별 인사를 하러갔다가 사장님께 들었다. 

들리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도준오빠가 미나미의 한 술집에서 호객행위를 한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수려한 외모로 오해를 받았으리라. 오빠는 츠루하시 고깃집 정육 창고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예상밖의 사실에 놀랐다. 

오빠는 고깃집 내에 서빙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마마에게 이야기해서 나를 소개 시켜준 것이다. 오사카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오사카사투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손님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서빙일을 부탁했던 것이다. 

규모가 꽤나 큰 가게였다. 3층이나 되는 그곳에서 나는 2층을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 여사장 다운 기품있는 인상의 마마는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덴쵸(점장)에게 일에 대해 설명을 들으라며 오늘부터 당장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1층에는 고기를 썰어주는 주방장과 두 명의 여종업원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손유진이라고 합니다." 나를 보고 반기지 않는 듯한 얼굴의 두 명의 여종업원. 인사도 받는둥 마는 둥 고개만 까닥할 뿐이다. 민망해 하고 있는 나를 덴초(점장)는 내가 일할 곳이라며 2층으로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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