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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May 24. 2022

파친코를 읽고 기억하다.

에피소드4

"유진아 인사드려라. 이모 친구들이야.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손유진입니다."


다니구치 타마코, 나가타 요우코, 그리고 요시모토 아키코. 

한국이름 옥자, 양자, 명자.

세 분의 성은 일본 남편을 따른 것이다. 한국의 성은 박, 이, 김

이모를 포함하여 세 분 모두 일본인 남편과 결혼해서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의 그녀들은 일본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명자 이모를 빼고는 일본어가 서툴다. 다니구치 타마코(옥자) 이모는 일본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일본에 온지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남편과는 보디랭귀지, 남편쪽이 한국어를 조금씩 배워서 겨우 소통을 하는 정도.  타국에서 언어도 되지 않는데 거기에 남편과도 대화가 통하지 않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한국인들과만 소통을 하다 보니 더 늘지 않는다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한 타마코이모는 아이가 없이 남편과 둘이 지낸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온 요우코 이모는 음식 솜씨기 뛰어나다. 이모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야키니쿠 가게에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인정많고 음식 솜씨 좋고 입담까지 좋은 요우코는 소개받은 가게의 덴쪼(점장, 사장)가 특히나 신뢰한다. 한국식 고기구이집이다 보니 한국사람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들으며 하는게 많은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녀들은 현재 일본에서의 고단한 삶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 하지만 과거는 공유하지 않는다. 깊은 사연이 있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들의 말투, 몸짓에서 지레짐작 할 수 있었다.

아키코(명자)이모는 아이가 셋이나 있는 남자에게 시집왔다. 내가 일본으로 왔을 때는 아들들이 모두 결혼해서 출가한 상태라 볼 수가 없었다. 큰 아드님과는 딱 한번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며 인사를 하러 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정도이다.  

재일 교포 3세인 그는 언뜻보면 일본인이다. 외모도 언어도 전혀 한국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부인들도 모두 일본인이라고 했다. 

이모는 모르고 왔다고 한다. 아들이 세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결혼을 하고 도일해서 보니 아들이 셋이나 있는 남자였다고 한다. 속은 걸 알았지만 한국에서 좋은 곳으로 시집간다고 소문이 난 마당에 다시 돌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모부)와는 크게 정이 없다고 하셨다. 그때 느낀 배신감이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다. 이렇게 온 것 한국에 있는 친정식구들이라도 편하게 살게 해주고 싶어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인들 사이에서 모진 따돌림도 감내하며 일만했다고 한다. 웃고 있는 환한 얼굴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던 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가끔 한국에 나가 친정식구들을 만나면 자신은 일본에서 호화롭게 지낸다고 식구들을 안심시키며 친정식구들을 위해 많은 돈을 쓰고 오기도 한다. 치열하게 살며 아끼고 아낀 돈으로 말이다. 

이모의 꿈은 일본에서 번 돈으로 노후에 한국의 부산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다.  이모는 지금도 오사카에 살고 있다. 끝내 이모는 일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이모가 일본으로 가던 그 시절의 가난한 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1억여 정도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은 순전히 옛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전히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이모. 한국에 와도 마땅히 돈벌이를 할 수 없고 자신을 챙겨줄 자식도 없는 상황이어서 한국에서의 생활은 의미가 없다. 아키코(명자)는 그렇게 일본땅에 남아 있다. 



이모는 나를 데리고 급하게 어디론가 향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이모의 가게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야키니쿠야(한국식 고기구이집). 마마(여사장님)는 재일교포 2세라고 한다. 이 분도 한국인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들 특유의 투명한 피부결과 갈색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간혹 나를 위해 짧은 한국어 단어를 써주긴 했지만 영락없이 일본인이 한국어를 하는 모습이다. 3시간 동안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시급 850엔. 한국에서 시급 3000원을 받던 시절이다. 

9평 남짓되는 작은 가게였다. 마마는 주방에서 음식을 다루기에 홀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주문을 받고 서빙, 그리고 설거지 등등 잡무를 하는.

오사카 사투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때라 홀에서 일하는 것에 두려움이 컸다. 그 때문일까. 이어지는 실수. 급기야 화를 내는 손님들도 있었다. 잘 알아 듣지도 못하면서 화내는 말은 또박또박 들렸다. "어디서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온거야. 마마."


일본에서의 아르바이트는 쉽지 않았다. 시급이 높은 만큼 일하는 시간동안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한국에서도 아르바이트를 몇 건 해봤지만 손님이 있으면 일하고 없을 땐 잠시 쉬어도 되는 한국의 바이트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손님이 없을 때에는 마늘까지, 깨갈기, 철판 닦이 등을 시키는 마마의 모습에서 재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시급이 높은 만큼 시간동안 계속해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던 일하는 자세가 다음 일자리였던 츠루하시의 야키니쿠야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들어오고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온다. 한 달에 2~3번은 들린다. 일본어를 잘 못알아듣고 재차 질문을 하거나 하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마마를 부른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할머니는 나를 싫어하는게 분명하다. 

좋지 않은 기분이 얼굴에 드러난 탓인지 마마는 나를 조용히 부른다. 티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잠시 반성하며 마마에게 갔다. 

"실은, 저 할머니 한국사람이야."

"네? 설마.."

"한국에서 시집왔는데, 외출할 때는 꼭 기모노를 입고, 한국어는 절대 쓰지 않아."


이곳 오사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이곳. 

내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쩌면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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