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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Jan 19. 2023

친구따라 강남간다

라라프로젝트 일상수집일기

강남은 세련되었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름이다. 

강남에서 만나자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뛰쳐 나간다.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서다. 


20대 중반 일본어 강사를 준비하는 수업에서 마음에 맞는 언니들을 많이 만났다. 

대부분 재취업을 원해 재교육을 받으러 온 3,40대 주부가 대부분이었다. 그때까지 미혼이었던 나는 주부역할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언니들이 너무나도 대단해보였다. 20대에도 천방지축인 모습에 대리 만족감을 느끼며 좋아해주던 언니들도 여러 있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놀기도 정말 열심히 놀았다. 

가장 먼저 강사직으로 취업하고 언니들도 함께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연락하며 서로를 독려하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개중에는 전화일본어회사를 창업한 언니도 있어 시간당 페이를 낮춰 일을 돕기도 했다. 순수하게 언니들이 좋아서 한 것이다. 모두. 

각자의 일이 바빠지고 서른 중반 결혼을 하면서 언니들과의 연락도 뜸해질 때 쯤이었다. 

전화일본어회사를 창업했던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유진아, 오랫만이지? 잘 지냈어? 보고 싶은데 선릉에서 만나자."

큰아이를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그립기도 했고, 언니의 안부가 궁금했던 찰나에 조만간 날짜를 잡고 만나자고 했다. 강남에서 만나자는 말은 기다림에 설렘까지 얹어주었다. 

다음날 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와서는 요즘 화장품 사업을 하는데 선물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 나올 수 있어?"

"오늘은 곤란해요. 언니, 큰아이를 맡기고 갈 곳이 없어서 동생한테 부탁을 해봐야 하거든요. 동생하고 시간을 맞춰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럼 약속을 그렇다 치고, 유진아 내가 하는 이 사업이 정말 대박이거든. 화장품 500만원정도만 사면 이게 두배 세배 가격이 돼."

"그런게 있다고요?, '돈 버는게 그렇게 쉬웠구나.', "그런데 언니 제가 지금 500이 없어요."

"카드도 돼."

"아........그건 남편하고 상의해볼게요."

"말 나온김에 내가 저녁에 집앞으로 갈게."

"집앞에 오신다고요? 머실텐데. 와주신다니 감사해요. 저녁에 뵈어요."

그 날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앞 카페에서 언니를 기다렸다. 

말쑥한 정장 차람의 낯선 여자와 함께 들어온 언니.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바로 지금 하고 있다는 화장품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같이 오신 분은 동업자이신데 이 사업으로 지금 타고 온 벤츠도 타고 월 천 이상을 벌고 있다고 한다. 

솔깃한데...신뢰가 300프로는 가는 외모다. 꽤나 미인인데다가.

낯선 일행 미인분은 가방 속에서 파일을 꺼낸다. 

사진과 기사자료가 잔뜩 파일링되어 있다. 

한 중년 부인의 사진에서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화장품을 쓴 전, 후 사진이었는데 분명 턱끝에 있던 점이었는데 화장품 사용 후에 점이 볼에 가 있는게 아닌가. 신기하다 못해 나도 모르게 이게 무슨 코미디인가 싶어 크게 웃고 말았다. 

순간 분위기가 싸아~

"유진아, 형부가 요즘 이거써서 피부가 엄청 좋아졌어. 그래서 형부도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찬성해."

믿지 않는 듯 큰 웃음을 보이니 대기업에 다니는 형부이야기를 꺼낸 듯 하다.

"아...그랬군요. 얼마나 좋은 화장품이길래 궁금하긴 하네요. 언니."

"그래서 말인데 너 주려고 두 병 가지고 왔어. 이건 내 선물이야. 한 병에 25만원짜리 비싼거다. 잘쓰고 괜찮으면 선릉사무실에 꼭 나와야해. 꾸준히 써야해. 알았지?"

어느덧 내 손에는 화장품 두 병이 들려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꾸준하게 발라본 화장품은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당시에 쓰고 있던 저렴이화장품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전화가 울려댄다. 

언니다.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50만원 내놔라." ...할 것만 같아서.

문자로 정중하게 선릉사무실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화장품을 사용한 후기를 보내드렸다. 

그 이후로 몇 차례 전화가 걸려오긴 했지만 옛정을 생각한 언니는 거기에서 멈춘 듯 하다. 

누가 언니를 변화게 만든 것일까.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맹모 저리가라는 열정으로 매달리던 언니는 교육비 마련을 위해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는 듯 했다. 

안타까웠다. 


그러고 4년 뒤.

함께 공부하던 언니 중 가장 말수가 적고 공부에 진심이었던 기억의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진아. 어떻게 지내?"

"와우. 언니 진짜 반가워요."

"우리 만나자. 좋은 강의가 있는데 너랑 같이 듣고 싶어. 선릉역으로 나올래?"

지난해 있었던 기억따윈 지나가던 비둘기에게 주고 말았는지 언니의 전화를 받고 다음날 선릉역으로 바로 나갔다. 역시 강의에 약한 나를 알고 있던 언니. 

'와~, 이렇게 좋은 강의를 왜 이제서야 알게 된거지?'

부(富)내 나는 30대 초반의 남자의 말에 홀린 듯이 강의 내용을 몽땅 기록하고 있었다. 

강의 주제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부자되는 법'이었다. 

강의도 좋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바른 듯한 외모에 나도 모르게 자발적인 신뢰감을 품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언니와 간단히 차 한잔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 안에서 아까 강의했던 그 강사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더니 명함을 한 장 주며 궁금한 거 있으면 카톡을 보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뇌의 명령따위는 듣지 않는 손가락이 맘대로 강사에게 카톡을 보내고 있었다. 

'강의 잘 들었습니다.'어찌고 저찌고.


다음날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너 혹시 강사님한테 카톡 보냈니? 강사님이 너를 엄청 좋게 봤더라. 사무실 나오면 다른 팁도 주신다고 꼭 같이 오래."

어머나나나나나나, 역시 난 누구에게나 호감가는 여자!

이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퍼즐을 맞추 듯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가 되고 나서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선릉역으로 나간 나는 하얗고 파란 색으로만 되어 있는 사무실에서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여 5시간이나 강의를 듣고 새뇌를 당했다. 

"이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는.....큰 돌 벌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좋은 사업을 왜 안하십니까."

아이들 하원 시간이 다가와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데도 언니는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무실 입구에서 옷과 가방을 맡기면 한쪽에 보관해두었다는 말을 듣고 직감적으로 사양을 했다. 손에는 가방과 겉옷이 들려있었고 재빠르게 겉옷을 입으며 아이들 하원시간이어서 가봐야 할 것 같은 말을 하며 입구쪽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던지.

입구쪽으로 이미 발길을 향하고 있는 모습을 뒤늦게 알아차린 언니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오는데 재빠르게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전속력으로 선릉역으로 뛰어갔다. 어느새 따라 왔는지 한 남자와 언니가 개찰구 앞까지 와서는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한다. 대충 알겠다는 눈인사로 돌려보내고 지하철을 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카톡이 연속으로 왔다. 

차단할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에 다음에 이야기 하자는 말만 되풀이 했다. 


다음 날 아침, 아이들 등원 차량을 태우러 나가는 길에 건물 모퉁이에 서 있는 언니를 발견했다. 

어쩌지.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1번 출구로 들어가서 5번 출구로 나와서 원장님께 다급히 전화를 했다. "5번 출구 앞에서 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마주칠게 뻔해 동네친한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서너 시간 뒤 집으로 돌아가보니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모르겠다. 

언니들을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인지.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말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인데 '쉬운 돈벌이'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 듯해서 씁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강남은 나에게 무언가 희망이 있을 것 같은 곳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인지 반짝반짝한 유리로 둘러쌓인 고층건물만 봐도 설렌다. 

부자들의 동네, 기회가 생길 것 같은 동네, 강남에 산다는 말만 들어도 믿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부푼 꿈을 꿀 수 있는 동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두려운 말이 되어 버린. 

"유진아, 강남에서 만나자."

친구따라 강남 절대 안 간다. 

아니 언니, 오빠, 동생.

누구따라서도 강남 안 간다.  


저를 부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많은 분들에게

"저는 어렵게 돈 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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