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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Oct 10. 2018

고통을 발명하다

김소연 시집 [눈물이라는 뼈] 중에서


나잇값만큼 깊어지는 여자의 우울과

우울을 모독하고 싶은 악의 때문에

창문 꼭꼭 닫아둔 여자의 베란다에선

여린 식물들부터 차례로 말라죽기 시작했다

볕이 너무 좋았으므로 식물들은

과식을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된 것이다


악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여자의 노련함 때문에

한 개의 꼬리가 아홉 개의 꼬리로 둔갑한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여자는

그림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를 친다


자기 기억을 비워내기 위해

심장을 꺼내어 말리는 오후

자기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헹구는 오후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홍등가가 되나


늙어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나이만큼 무한 증식하는 추억 때문에

여자의 심장이 비만증에 걸린 오후

드디어 여자는 코끼리로 진화했음을 안다


진화에 대해서라면 여자도 할 말이 있었다

한때 여자도 텅 빈 육체로 가볍게 사는

작고 작은 새 한 마리였으므로


이제 여자는 과거에 대해서만

겨우 할 말이 있을 뿐이다

공복의 시간은 여자에게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없고 시시각각만 존재하는

여자 앞에서

아무도 세월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축대 난간에 기댄 모르는 노인네의 울음까지도

귀 기울여 참고해왔으므로 여자는 안다


사람의 울음을 위로한 자는 그 울음에 집착된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그러나 울음은

유목의 속성이 있어 들어줄 사람을 옮긴다

더 큰 울음을 장전하기 위해

더 큰 고통을 발명한다


여자의 손 안에는 꼭 쥐어 짓물러진

과일이 들어있다

그 즙이 소맷자락을 타고 올라가

끈끈한 악취를 풍긴다

그럴 때면 여자는 안달이 난다


악취를 우울로 포장해줘

시퍼런 나뭇잎들은 나의 우울을 모독해줘

후외없이 하루를 살다 누렇게 시들게 해줘

여자는 언제나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순교자를 강간하고 퍼질러 앉았던

꽃방석이 있다

비로소 여자는 기형아를 낳는다


기형아를 꺼내고 홀쭉해진 배를 여자는

시뻘건 육식으로 가득 채운다 마치 아귀처럼

마치 악다구니처럼 그렇지만 아





김소연 시집 [눈물이라는 뼈]를 시읽기 온라인동호회 멤버들과 함께 4주째 읽고 있다. 뭔 시집 한 권을 4주씩이나?? 하시겠지만 4주간 3번 정도 읽고서야 간신히 시를 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처음엔 도대체 이건 뭔 소리지?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짧고 쉬운 시 위주로 필사를 시작했고 3주 차 정도부터는 두 번 세 번  곱씹어가며 읽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시인의 감정, 고통이 이해되는 시들이 늘어났다.


그중에 4번째로 필사한 시  "고통을 발명하다"는 나이를 먹는 중년 여인의 우울감, 그 우울감으로 인한 '나쁜 감정' 그리고 그 '악' 포장하는 자기변명을 집어던지고자 심장을 꺼내 말리고 내장을 꺼내 헹구는 노력이 눈물겹게 느껴졌다. 아무리 기억과 슬픔을 비워내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고 자가 증식하는 추억들... 늙어가는 몸만큼 무한 증식한 추억으로 비만증에 걸려 코끼리로 진화한다는 표현에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추억도 매머드만큼 비만해졌기에 깊이 공감한다.  한 때 텅 빈 육체로 가볍게 나는 작고 작은 새 한마리였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왕년의 공복의 시간을 더듬거리는 중년의 여자라니.. 어쩐지 짠한 슬픔이 전달된다.


시간이 하도 빨라 시시각각 초단위로 쪼개어 세월을 한탄하는 노인네처럼 울며 울며 더 큰 고통을 발명하는 인간의 모습, 여인네의 모습이 안쓰럽다. 결국 고통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인 것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나의 고통을 만들어내 쏟아내고 싶은 인간의 나약함이 악취가 되어 시퍼런 나뭇잎조차 누렇게 시들게   만드는 게 아닐까?


우울과 고통을 발명해 울음을 장전하고 들어줄 이를 찾아다니다 쓸쓸히 돌아온 집에서 심신이 병든 기형아를 낳고 마는 어머니는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육식으로 배를 채운다 아귀처럼... 슬프게도 중년 여성이 느꼈을 만한 그 우울감과 고독감을 마치 아귀처럼 악다구니스럽게 육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일 뿐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내겐.  애처롭게 늙어가는 여인의 공허함을 그토록 흉물스럽게 묘사하며 아름다웁다 말하는 건 반어법 같은 걸까?   현실을 수긍하지 못하고 고통을 발명해 우울과 눈물을  창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쩌면 내 모습 같아서 아닐까?  남녀를 떠나 모든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시인 김소연을 다시 보게 되어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어보니 시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내 얘기로 시작하여 내 기가 아닌 것들로 흘러가고 있어요.  내가 누구인지 점점 더 잊어가고 있어요. 자아 자체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요. 텅 빈 인간이 되고 싶어요. 투명해지는 인간. 물을 닮은 액체 같은 인간. 이 세상에 내가 만나는 접촉면들에  어떤 식으로든 물들고. 더 그 접촉면을 젖게 만들고 싶어요. 내가 감응하고 변할 때마다 내가 쓰는 시가 변했으면 해요. 물론 이 세상도 변했으면 해요. 처음 시를 쓸 때는 제가 쓰는 언어를 잘 다루고 싶었다면, 지금은 언어 자체에게 자리를 더 많이 내어주려고 하는 것 같고요.."


자아 자체를 버리고 텅 빈 인간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인터뷰를 보니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다. 속세의 인간인 내가 시인의 나이와 생김새가 궁금해져 프로필을 찾아 보고서 역시 그러네, 내 예감이 맞았어하는 만족감을 느낀 걸 보면 난 참 보통사람이고 말이다. 아무튼 김소연 시인의 세계는 점점 빠져드는 맛이 있다. 중년 여성이라 더욱 공감되는 그런 어떤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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