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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Oct 12. 2018

아무 일 못하고

97세 할머니의 일기


큰 물이 나갔다. 그래서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집에서 목욕하고 이제 이 글을 쓰고 있다.

늘 밭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있으니 뭔가 잊어버린 것 같아서 허전한 마음까지 든다.

얼른 장마가 끝이 나야 일을 하게 되는데 언제 끝이 날것인지 맘만 답답할 뿐이지.

가만히 집에 있으니 그저 들리는 것은 투둑새 우는 소리만 들린다.

새 짐승도 해가 나고 맑은 날씨가 즐겁지 안개 끼고 흐린 날씨는 답답하겠지.

사람이고 동물이고 다를 바가 있을까?

더욱이 집도 없이 오락가락하는 짐승인데 그저 아무 데나 앉아서 투둑 투둑 울기나 하는 새 짐승인데 때로는 뭣을 먹고 사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사람 심어 놓은 콩이나 파서 먹고 있으니 그것도 봄 한철이지 요즘에는 그조차도 없고 뭣을 먹는지. 여름에는 날씨나 따뜻하지만 겨울에는 눈보라 속에서 어트케 사는지 생각하면 새 짐승도 불쌍한 생각이 든다.


엊그제 막내 녀석이 왔다가 갔는데 가서는 전화 한 통도 없구나.

자식이 그저 든든할 뿐 애책 시럽게 키워봤자 괜히 부모 맘만 걱정이지 자식은 부모 생각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쓸데없이 혼자 생각뿐이지. 그래도 왠지 잊혀지지 않는 자식이 다 뭔지. 그저 빛 다른 음식을 봐도 자식 생각 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왜 그리 못 잊는지. 참 내가 생각해봐도 그 부모의 맘뿐이고 다 소용없는 줄 생각하면서 그래도 잊지 못하고 쓸데없는 생각 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하면서도 그래도 못 잊고 늘 자나 깨나 그늠에 자식 생각하게 되는구나.


이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낮에 일하다 밤에 자다가 살무시 숨졌으면 그것이나 바라고 있다.


   




1922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97세가 되신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를 책으로 만든 "산골 할머니의 일기, 그 소박함과 다정함"을 읽다 보니 우리 엄마, 할머니 생각이 난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골서 혼자 살면서 농사지으며 몸을 바삐 움직이는 할머니가 삐뚤빼뚤 일기를 쓰며 자식 생각하며 혼자 지새우는 밤이 떠오른다. 자식 키울 때뿐이지 다 소용없다는 말씀이 짠하다. 나도 그런 자식이고 또 그런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다 보니 남 얘기 같지 않은 거다. 밤에 자다가 살무시 숨졌으면 그것이나 바란다는 말씀도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그래도 자식 한번 더 보고 자식 옆에서 하늘나라 가고 싶은 마음이실 텐데...


참 세상사는 사람의 모습, 부모님의 모습은 비슷한가 보다. 내가 늙어서 시골서 혼자 살면 꼭 할머니처럼 혼자 글 쓰고 있을 것 같다. 외롭거나 무섭거나 그저 자식 생각만 하며 살다가 가긴 싫은 걸 보면 난 역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보다. 벗들과 함께 시도 읽고 글도 쓰고 자연 속에서 사람 속에서 살다 죽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이제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걸까? 너무 오래 살아야 하는 숙제를 지금부터 풀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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