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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Nov 09. 2018

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시몬 느 보부아르 소설


니콜은 예순 살의 은퇴한 선생이었다. 은퇴한. 그녀는 그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첫 부임지가, 첫 수업이, 시골의 가을날 발치에서 부스럭거리던 낙엽들이 떠올랐다. 은퇴한던 날-흘러간 시간만큼 혹은 그녀가 겪은 시간만큼 그녀로부터 멀어진-은 마치 죽음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일이 닥쳐왔다. 그녀는 경계선 너머로 건너와 있었다. '나는 다른 쪽에서 온 사람이야.' 그녀는 일어나서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확실히 다시 살이 찌고 있었다. 체중이 무너지는 건 짜증스러운 일이다.


니콜이 다른 여자와 공감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녀들은 '아내라는 직업'을 떠들썩하게 수행한다. 마치 진짜 직업인 것처럼! 나이 든 여자들은 니콜을 어린아이처럼 반항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은 니콜에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여자는 못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탐험가도, 비행사도, 원양어선 선장도 되지 못할 터였다. 여자. 모슬린이나 오건디 같은 여성의류 옷감, 지나치게 부드러운 엄마의 손, 말랑말랑한 반죽 같은 엄마의 팔, 그녀의 팔에 달라붙어 있던 엄마 냄새. 엄마는 니콜이 부자와 결혼하기를, 진주와 모피를 소유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녀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 여자도 할 수 있어." 그녀는 공부를 계속했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기로 결심했다. 주목받는 논문을 쓰고 소르본의 정교수가 될 작정이었다. 여자의 두뇌가 남자의 두뇌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다른 여자처럼, 남편에게, 아들에게, 가정에 잠식당했다.



앙드레에겐 순간순간에 전념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지워 버리는 재주가 있으니까. 관계가 불편해지면 그는 그녀를 잊었고 멀리 떼어 놓았고 다시 만났을 때는 그녀가 진정되어 있으리라 여겼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자기가 행복하면 그녀도 행복해야 했다. 사실 둘 사이에 진정한 유사성은 없었다. 그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모두 가졌다. 가정, 아이들, 여가시간, 오락, 우정 그리고 몇몇 흥분 거리. 그 때문에 그녀가 젊은 시절 품었던 야망을 포기하는 동안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여자가 되었다. 다른 남자 같으면 일하라고 그녀를 격려하고 솔선수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일에서 떼어 놓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그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다시 빈손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마저 그녀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사랑에서 분노가 생겨나는 잔혹한 모순, 그리고 분노가 사랑을 없애버렸다. 앙드레의 얼굴을,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더욱 원망이 끓어오르고 황폐해졌다. 오랫동안 지병에 고통받아 온 사람처럼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찢기는 것 같았지만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게 뭐?' 그녀는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자문했다. 해결책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 함께 살 것이고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감출 것이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다. 앙드레 곁에서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한다.

   


나이가 들면 풍요로워질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 세월은 포도주에 향미를 선사하고 가구에 고색을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경험과 지혜를 제공한다. 각각의 순간은 더 모범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다음 순간들에 둘러싸이고 그 순간들에 의해 정당화되며 마지막에 실패가 회복된다. '침묵의 원자 하나하나가 성숙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는 이런 믿음의 함정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몽테뉴처럼 삶을 죽음의 연속으로 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는 '삶은 점진적 박탈의 과정'이라는 피츠제럴드의 개념도 거부했다. 그의 육체는 더 이상 스무 살 때의 육체가 아니었고 기억력도 조금 약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약해졌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니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들이 여든 살에도 서로 닮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다. 니콜이 비웃는 못 말리는 낙관주의. 그는 예전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이 몇 개가 빠지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래서 틀니를 하게 될까 봐 겁을 먹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늙어빠지면. 어쨌든 그는 그들의 사랑에 결코 퇴조가 없기를 바랐다. 심지어 늙으면 니콜이 더욱 자기에게 신경을 써주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뭔가 망가져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몸짓, 그들의 말속에서 무엇이 과거의 판에 박힌 반복이고 무엇이 새롭게 활기찬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까?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젊어 보이시네요. 젊으세요. 비참한 내일을 예고하는 모호한 칭찬. 젊음을 유지한다는 건 활력, 기쁨, 정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늙음은 타성, 침체, 망령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늚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심지어 그건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늙으면, 기만적인 말들로 늙음을 신중하게 감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칠십팔 년의 생애 동안 사상가, 여성운동가로 두루 업적을 남긴 유명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와 50년간 동료로 지냈고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다 그만둔 뒤 소설, 희곡, 에세이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집필했다.  여성의 사회적 조건을 고찰한 에세이 "제2의 성"으로 전 세계에 여성 문제를 환기시켰으며 1986년 사망 후 1992년에  미발표 작품 "모스크바의 오해"가 발표되었다. 은퇴한 교수 앙드레와 은퇴한 60세 교사 니콜이 러시아를 여행하며 겪는 갈등을 소설로 였었는데 보부아르가 교사생활을 했다는 점, 작품 속에서 앙드레가 참여 성향의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오십 년간 이어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나는 이 책을 옮긴이의 말을 통해 보부아르가 스물한 살에 최연소이자 차석으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으며 이때 수석 합격이 장 폴 사르트르였으나 당시 심사위원들이 실제로는 보부아르가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는 뒷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 시대 여성을 공식 수석으로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유럽에서 여성의 지위가 열악했고 보브아르가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다가 그만둔 뒤 작가 생활을 했다는 점을 통해 다분히 이 책 "러시아에서의 오해"가 작가의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부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이 육십에 은퇴자가 되었고 아내라는 직업을 떠들썩하게 수행하는 여자들과 공감을 못하며 남편조차 함께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혼자 외롭게 늙어가는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십도 안된 내가 벌써 그 마음을 안다고 하면 보부아르가 너무 애 늙은이라고 하시려나 모르겠지만 충분히 짐작이 간다.


여성의 관점에서만 일방적으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앙드레의 관점에서도 글을 쓰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내가 감할 수 있는 부분은 니콜의 입장이었다. 체중이 늘어날 때의 짜증, 젊어 보인다는 모호한 칭찬에도 불구하고 늙음은 타성, 침체, 망령이라고 단언하는 말이 오히려 속 시원하게 맞는 말 같다. 여자는 못한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자라 남편, 가정, 아이들에 잠식당해 본 여성의 입장에서 너무나 공감되는 그녀의 글, 왜 여성운동가라는 호칭을 들었는지 알겠다. 나이가 들면 풍요로워질 거라는 못 말리는 낙관주의를 깨고 현실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늙음과 고독을 받아들이며 빈곤 속에서도 덜 비참해지는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한 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같이 늙어가는 부부가 있다면 최소한의 오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그런 메시지 살짝 첨가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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