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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May 20. 2019

아는 만큼 본다

한동일"라틴어 수업"을 읽고

Tantum vemus quan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잊지 못할 장소일 수도 있고요. 그 책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그림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만났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겁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뒤흔든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처럼 흔들리고 나아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혹 그와 같은 뭔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천천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혹 내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지, 깨어 있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저자 한동일 교수는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로 로마 라테라노 대학에서 석사,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에서 라틴어 강의를 했는데 최고의 명강의로 소문이 났고 그때 강의 내용을 토대로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있어 보이려고 공부하기엔 라틴어 동사 활용표 하나만 봐도 기가 질려 책을 덮을뻔했다. 하지만 괜히 명강의로 소문난 건 아니었다.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 같은 그런 면이 있었다. 첫 강의부터 파격적인 그의 수업방식은 꽤 멋져 보인다.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평소와 달리 잉여 시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그냥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않게 생긴 이 시간 동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봄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는 겁니다. 자, 이제 이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러 운동장으로 나가십시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힘들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의 운동장에는 어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이 강의의 수강생이었다면 첫 수업 휴강 후 운동장에 나가 아지랑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내 마음속에 꿈틀대는 아지랑이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 늘 깨어있어아먄 만날 수 있는 모멘텀.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모멘텀은 무엇이었을까? 내 영혼을 흔든 무언가가 있었던가? 몰라서 못 본 건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지 되돌아본다.  아련하지만 가슴이 떨리는 설렘을 느꼈던 첫 순간은 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 "데미안"을 읽었을 때 같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을 때, 세 번째는 40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까사 바트요" 옥상에 설치된 작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었을 때, 네 번째는 아들과 함께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우연히 설치미술을 봤을 때 같다. 늘 깨어있기 위해 열심히 책도 보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하는 덕분에 아직 설레고 늘 볼 것이 많음에 감사드린다. 교수님 말 데로 아는 만큼 보인다고 꾸준히 배우고 익히고 깨어있는 노력을 해야겠다.

 

ulnerant omnes, ultima necat.

  불네란트 옴네스, 울티마 네카트.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우리 마음에는 철도의 선로와 같은 길이 놓여 있어요. 우리가 타인을 통해 자기 안의 약함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속의 선로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모든 잘못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어떤 사람은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때로는 마음에도 선로 전환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로 인해 상처 받았을 때, 그래서 내 안의 약함을 볼 때 기차가 ‘내 마음의 역’으로 향할 수 있도록 선로 전환기를 작동하는 것이죠. 이게 올바로 작동해서 상처를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전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신체적, 물리적 나이가 해결해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 꼭 성숙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사고의 폭이 좁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쉽지 않지만 상처가 꼭 피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상처는 나의 약점이나 단점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니까요. 마음의 분별, 마음의 선로 전환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무작정 상처 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마치 폭발 직전의 폭주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필요합니다. 제 경우에는 상처가 오히려 그런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되어주었습니다. 멈춰 서서 제 안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으니까요. 그래도 때로는 ‘이 간이역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건 아픈 거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이 간이역을 지나고 또 지나면 제가 닿을 종착역도 어디쯤인가 있을 겁니다. 오늘 여러분이 잠시 머문 간이역은 어디인가요? 그곳은 어떤 풍경을 가지고 있나요?


상처를 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내 안의 약함을 분별하는 선로전환기를 작동시켜 나를 바라보며 쉬어가는 간이역의 역할을 한다참 공감 간다. 남 탓하는 일차적인 관점을 돌려 나의 마음을 읽고 분별력을 키우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변 풍경을 보며 성찰하고 성숙하는 시간. 잠시 머문 간이역의 기억은 날 미소 짓게 해주는 과거의 시간이 돼버린다. 종착역은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종착역까지 무조건 빨리 간다고 일등도 아니고 성공도 아닌 것을. 간이역마다 쉬어 간다 해서 종착역을 못 갈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조바심 내며 미친 듯이 질주했던 걸까?


한동일 교수님의 학생이 되어 그의 중간고사 과제물에 답을 적어볼까? 라틴어 문법이나 단어 문장 해석이 아니라 ' De Mea Vita'  내 인생에 대해 적어 내라 하면 당황할 사람이 꽤나 많겠지만 다행히 오십을 바라보는 나는 이미 간이역에 정차해서 일 년 전에 그 숙제를 스스로 했다. 덕분에 지금의 평화로운 마음의 평화를 얻 다음 역을 향해 또 이미 출발했다. 지금은 속도는 느려졌지만 방향을 잡고 가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오십에 나만의 바다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런 라틴어 수업이라면 꼭 한 번 들어보고 싶다. 그 렵다는 라틴어를 시험이나 성적을 위해서 아니라 인생을 위해 충분히 배울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교수님의 강의라면 반드시 수강할 의향이 있지만 현재 강의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한 번 더 책을 읽어봐야겠다.  더 많은 것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한 라틴어수업 정말 멋진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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