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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Apr 14. 2018

너무 한낮은 언제쯤?

너무한낮의 연애를 읽고

김금희 단편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 제목만 봤을 때 떠오른 건 대낮의 연애 행각이었다. 내가 너무 외설적인가 보다. 가끔 아이들과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가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이 찰싹 들러붙어 손잡고 비벼대고 뽀뽀하고 난리도 아니다. 우리 나이엔 사람들 많은 곳에서 그런 스킨십을 상상도 못 하였지만 요즘은 뭐 다들 그러고 있어서 그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더 꼰대 취급을 받는다. 아무튼 그런 상상을 하며 책을 열었는데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회사 요직에서 좌천되어 뜻하지 않은 곳으로 보직을 옮긴 필용이 16년 전 다니던 종로 유학원 옆 맥도널드를 갑자기 떠올려 어느날 점심시간에 그곳을 일부러 가게 된다. 내 기억 속에 종로 역시 어학원, 패스트푸드, 뒷골목 술집과 택시 잡던 한밤중의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대학시절 영어 회화 학원 안 다니는 사람이 없었으니 나도 학교는 출석 채우러 다니고 종로학원은 일수 도장 찍듯 꼬박꼬박 들렀다가 커피숍 쟈뎅에서 영자신문 스터디 모임을 했었다. 그리곤 가끔 저녁에 모여 술을 코가 삐뚤어지게 한잔하고 택시잡느라 고생한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종로거리는 지금 금요일 밤 강남역 앞에서 택시잡기 어려운것 만큼이나 만취객으로 복잡했다.  

  

어쩌면 필용이 회사에서 잘 나갈 때야 회사 근처에서 직원들과 식사하러 다녔을 텐데 좌천되고 느끼는 소외감, 실패감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돈도 없이 학원 다니던 시절과 오버랩되어 맥도널드로 이끈 것이 아닐까? 나도 가끔 직원들과 딱히 할 대화도 없고 혼자 조용히 점심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 맥도널드를 간다. 회사 주변 점심시간의 식당은 늘 시장바닥처럼 복적 된다. 가끔은 혼 밥으로 타인과의 결별을 선택하고 싶은 자유시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맥도널드에서 필용은 우연히 연극 광고 “나무는 ㅋㅋㅋ 웃지 않는다”를 보고 옛날 양희가 쓰던 대본임을 발견하게 되어 옛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극 속 양희는 확실히 일반적 여성은 아니다. 늘 이천 원을 내밀며 가능한 걸로 주문하면서 별 느낌이 없는 것도, 필용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르겠다고 말할 때도 늘 한결같이 평범하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사람에게 가능한 일 일까? 어느 날 더 이상 필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필용이 일방적으로 양희에게 퍼부어 댈 때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나가는 모습은 좀 일반인 같았지만 양희 집을 찾아온 필용에게 하는 한마디는 마치 도인 같았다.  “ 선배, 나무나 봐요..” 

  

 나무는 늘 한결같다. 늘 그 자리에 그냥 우두커니 서 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다르다. 봄에는 잎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무성해지고 가을에는 떨어지고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계절을 수용하고 자연을 따르며 사람들에게 의지할 곳을 만들어 주는 나무야 말로 양희가 원하는 인간상이었을까?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기는 할까? 양희는 그런 나무처럼 되고 싶었을까? 

  

풍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면서 자신의 통장에 있는 전 재산 30만 원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삶이 양희가 사는 세상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요즘 자발적 가난이라 해서 스스로 가난을 택해서 필요한 만큼만 벌어서 쓰고 없으면 없는 데로 사는 욜로족들의 삶을 자주 보게 된다. 정말 가족과 아이를 키우며 그런 삶을 사는 게 가능할까 생각해 봤다. 많은걸 얻기 위해서는 많은걸 포기해야 되는 세상에서 조금 얻고 조금 버린다면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요즘 나의 생활은 젊은 시절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던 직장생활에 비교하면 아주 나태할 지경이다. 전보다 조금 일하고 조금 버는 대신 내가 얻은 것은 글을 쓸 시간과 책을 읽을 시간, 아이들 하교를 봐주고 저녁을 해서 함께 먹는 즐거움이다. 얻은 것은 시간과 행복이요 잃은 것은 돈이니 나름 괜찮은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욜로족은 아니지만 영희처럼도 살고 싶지 않다. 영희가 연극을 통해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본인 스스로 행복하다면 그게 최선이겠다. 하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그렇게 평생 무언가 꿈을 꾸듯 사는 걸 원할 수 있을까? 

  

영희든 필용이든 앞으로 어떤 삶을 살든 각자 자기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누가 누구의 삶을 맞다 틀리다 할 수는 없다. 그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게 우리가 사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 내 인생을 보고 왜 그렇게 사냐고 하면 아주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러니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무처럼 바라봐주고 수용해 주고 싶다. 그래서 영희의 한마디 “나무나 봐요”가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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