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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Jun 09. 2018

사랑이 뭐길래

알랭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고

알랭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여주인공은 미국 뉴욕 소호 스퀘어에 있는 광고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는 앨리스다. 그녀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연인 같은 “다른 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였다.  함께 사는 친구 수지하고 가사를 분담하며 살고 있지만 간호사인 수지는 최근 젊은 의사와 사랑에 빠졌다. 속으로 박탈감에 시달리면서 친구를 위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최근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강한 욕구와 맞서고 있다.


앨리스는 자신이 왜 이렇게 절망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행복이란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던 자신이 아닌가. 괜찮은 직장이 있고 건강하고 살집이 있는 마당에 왜 주기적으로 아이처럼 울고 짜고 난 리람? 불만이 있다면 자신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뿐이었다. 지구 상에서,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 자신은 불필요한 존재 같았다. 아마 눈물 뒤에는 그녀가 어느 날 지구 밖으로 미끄러져 떨어져도 그 빈자리를 1분 이상 생각해주는 이가 없으리라는 서글픈 의심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낭만주의자다. 앨리스의 절망을 공감할 수 있다.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지 않을까? 나만 그런가? 나 스스로 건강하고, 부모님 계시고, 집 있고, 직업이 있고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싶다가도 문득문득 올라오는 슬픔과 우울함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앨리스의 사랑, 연애도 깊이 공감이 가는 것일까?


앨리스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렸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예전에는 혼자인 것이 농담과 가벼운 장난의 대상이었지만 점점 말 못 할 무게감이 더해졌다. 연애 문제는 물 밑으로 들어갔지만 다른 데서 그 반향이 감지되었다. 앨리스는 과거에 낙천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이제 그녀가 모든 면에서 안 좋은 편에 서는 걸 알게 되었다. 세계 경제와 생산, 미래의 남녀관계와 가족, 문명의 가치와 교육의 기준, 도시 위생과 구두 가격, 날씨와 자연파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견해가 몹시 우중충한 색조를 띠었다. ‘어쨌거나 인생은 무의미하다. 남자와 여자는 결코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메스꺼운 농담일 뿐이다’ 란 말과 함께 심오한 판단을 내리곤 했다. ‘난 불행해’라는 생각이 ‘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익한 활동’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란 어찌나 쉬운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경박한 불평이 ‘사랑은 환상’이라는 우아한 경구로 승화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흥미로운 점은 존재와 사랑이 무익하냐가 아니라 어떻게 본래의 촉매제는 사라지고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좌우명만 남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감정을 안 느껴본 사람이 없지 않을까? 앨리스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의외지만 주변의 많은 싱글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운 많은 커플들이 똑같이 가져 본 감정 이리라. 극단적이긴 하지만 인생이 무의미해지고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익한 활동이라는 생각은 언제든 불쑥불쑥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불청객이다. 그저 오면 오는 데로 가면 가는 데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마음 상태에 따라 앨리스의 인생관은 계단형과 빨래 건조기형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계단형 상태일 때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생은 느릿느릿 흐르지만 결국 계단 끝에 있는 행복과 안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빨래건조기에 비유할 수 있는 철학적인 관점이 있었다. 건조기의 특징은 내부의 드럼이 일정한 시간 동안 회전하는 데 있다. 옷을 일정량 넣으면 드럼이 회전하는 데 따라 그 안에 든 빨래가 빙빙 돌았다. 어느 순간 강화 유리창으로 청바지가 보이고 또 양말이 보이고 셔츠가 나타나고 행주가 보인다. 안에 든 옷이 항상 다 보이지는 않지만 드럼이 회전하면서 규칙적인 간격으로 그 모습을 보였다. 청바지가 행복을 나타낸다면 양말은 의기양양한 기분, 셔츠는 나태로움, 행주는 울부짖는 비참함을 나타낸다. 건조과정은 삶의 과정과 견줄 수 있어서 한번 왔던 것이 도리 없이 다시 오면서 인생살이는 반복이고 존재는 돌고 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런 표현을 보면 알랭 드 보통이 역시 보통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삶의 관찰을 통한 글쓰기,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건조기형 인생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릴 적에는 계단형으로 내가 발전해 나갈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지만 갈수록 그냥 일상을 빙빙 도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건조기에 빨래 대신 먹고사는 고민을 말려 버리고 싶은 그런 삶 말이다. 슬픈 건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하루하루다. 내가 죽어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고 내가 없어도 우주는 한결같이 돌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그냥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많을수록 좋다)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지도록 한다. 에릭은 무게를 폭넓게 분산했다. 여자 친구를 몇 명씩 유지하는 것 (거절을 당하더라도 곧바로 구조가 무너지지 않도록 위험을 줄이려고), 어느 집단이 등을 돌려도 생존할 수 있게 충분히 많은 집단과 교제하는 것,  어느 거래가 실패해도 견딜 수 있게 돈을 많은 버는 것 이 그 남자가 세운 기둥들이었다… 앨리스는 이와 딴판으로 매우 현명하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녀는 모든 욕구를 기둥 하나에 모으는 경향이 있었고 그 기둥 하나가 온 무게를 견디길 바랐다.


사실 남자와 여자의 사고와 감정은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지성적인 사랑을 하는데 비해 여자는 낭만적인 사랑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것처럼 무게를 분산시키는 건축가가 훨씬 안전하고 부상 위험이 적은 반면 한 기둥에 모든 걸 집중하는 건축가는 무너지면 죽음이다. 꼭 남자, 여자가 아니어도 사람에 따라 어떤 성향이 강하냐에 따라 사랑에 집착해 무너지면 재기가 불가능한 사람을 보게 된다. 영리하게 사랑을 하는 게 답인지 사랑이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는 게 답인지 정답은 없다. 덜 다치고 싶으면 기둥을 분산시켜라! 목숨을 건 사랑 따위는 없다?  뭐 이런 게 요즘 사람들의 사랑 법이 아닌가? 남자든 여자든 죄다!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미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양쪽이 저울의 수평을 유지할 때에만 한쪽이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상대도 자연스럽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에만 권력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세한 차이만 벌어져도 권력은 재등장 신호를 보낸다.  


사랑을 하면서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 권력싸움을 하는 많은 커플들이 공감할만한 내용이다. 소위 ‘밀당’이라고 표현하는 기술을 쓰면서 샅바싸움, 기싸움을 하는 사랑.. 진짜 사랑일까?  끊임없이 물어보면서 듣고 싶은 말은 “ 그래, 사랑이야”가 아닌지… 사랑이 뭐길래 세상 사람들  고민은 다 비슷하다. 이제는 사랑따위 없어도 살수 있 않을까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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