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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Jun 02. 2018

억겁의 세월을 건너온 인연?

최인호의 인연을 읽고

최인호 작가의 2009년 에세이 ‘인연’을 우연히 집어 들었다. 부모님 세대인 남자분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에세이를 쓸지 궁금했다. 2009년 당시 60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 대한 글이나 아내에 대한 글을 보면 감성적인 부분들이 많았다. 열 살 나이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오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5년 만에 누런 갱지에 적힌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 들고 자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며 본인은 자식들에게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무슨 돈을 어떻게 나누어 준다는 사실 이전에 자식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전해주는 일이 될 것이며 오랜 세월 자식들의 가슴에서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언어로 남아야 진정한 유언의 의미일 거라고 말한다.

나 또한 한 번도 유언이라는 걸 미리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간 아이들 아빠가 편지 한 장 남기지 못한 게 얼마나 큰 아쉬움 일지 생각해봤다.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평상시 글로 남겨 아이들이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지금은 하나하나 다 말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시간들을 기억해 준다면 정말 행복할 거라는 그런 바람으로 글을 쓴다는 걸 아이들은 모르겠지?


최인호 작가 아버지가 변호사로 일하시다 돌아가시고 순식간에 처참한 가난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버스 값이 없어서 몇 정류장쯤은 노상 걸어 다녀야 했고 교복이 없어서 형이 입던 교복을 줄여 입고 형이 신고 다니던 해진 신발을 끌고 다녀야 했으며 엄마가 하숙을 치는 것으로 학비를 충당했다니 가장의 부재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 상상이 간다. 그럼에도 60  넘은 나이에 어려서 아버지 다리를 주물러 드렸던 기억 그 촉감을 기억하다니..


아버지의 다리는 굵고 통나무처럼 딱딱했다. 내가 신나서 밞고 때리면 간혹 시원해서인지 느닷없이 방귀를 뀌곤 하셨다. 내가 깔깔 거리고 웃으면 아버지는 그저 소처럼 웃으셨다. 방귀를 뀌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시원해하신다는 신호였으므로 나는 신명난 무당처럼 돈이고 뭐고 숫자를 세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실컷 공짜로 서비스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께서 “ 됐다. 이제 그만둬라” 하시기 전에는 결코 아버지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늙어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어 노인이 되었지만 아버지 몸의 질감은 여전히 생생한 어린 시절의 그것으로 내 손바닥에 남아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어머니의 전속 안마사가 되었다….. 나는 삼십 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렀다. 나이 들고 돌아가시기까지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나는 어머니가 죽음 가까이 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손바닥은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어머니의 다리 피부 변화를 기억하고 있다…. 다리를 못쓰시게 되고부터는 말라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뼈만 남아 있었다. 다리를 주무르다가 나는 몇 번이고 울곤 했다. 어머니의 다리에서 생명이 희박해져 가고 있는 걸 나는 손바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어머니 다리를 주물렀다는 작가님이 존경스럽다. 나는 정말 어려서 몸무게가 가벼울 때 아빠 등에 올라가서 허리와 등을 올락 낼락 밞아 드린 기억이 다인데.. 가까이 는데도 한 달에 한번 뵙고 저녁 먹고 오는 게 다이니 평생 예쁘게 키운 막내딸이 무슨 소용인가? 그저 지 자식 키우느라 정신없고 에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중학교 2학년이었던 형은 내게는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형은 당시 어린 나이에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형은 가난한 가장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다정한 친구이자 또 때로는 무섭고 엄한 선생님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거리에서 형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당시 명문대에 들어간 형은 가정교사로 일을 하며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손목을 잡고 제과점으로 들어가 빵을 사주었다. 오랜만에 크림빵과 단팥빵을 먹느라 정신이 없던 내게 형은, 우리는 너무 가난해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의 노력밖에는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일으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형이 그날 제과점에서 해준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지금까지 이끌어준 힘이었다고 나는 고백한다.


우리 둘째도 형을 이렇게 생각할까? 둘째 열 살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형이 열여섯이었으니 당시 고등학생 형이 아빠처럼 든든하고 친구처럼 다정한 존재였던 것 같다. 지금도 형과 함께 있을 때 제일 행복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형이 일본 대학교로 진학하겠다는 게 영 섭섭한가 보다. 한 번은 “ 형, 일본에 안 가면 안돼?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돼?” 하길래 내가 말했다. “ 형은 형의 인생을 살아야지. 형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한 거야. 형의 앞길을 막으면 안 되지..” 하고. 인생은 다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니 스스로 일어나 그 길을 걸어 나가지 않으면 형도 엄마도 일으켜 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날이 오겠지…  


최인호 작가의 인연 중 첫째는 아내이고 가족이다.  


나는 어찌 보면 심각한 팔불출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글을 쓰든 아내 자랑, 자식 자랑을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족사랑에 팔불출이란 없다. 가족은 나의 영원한 동지이자 우군이자 나의 어깨뼈이며 나의 척추와 내 머리에서 자라는 검은 머리카락이자 나의 눈동자, 내 몸을 이루는 그 모든 기관이기 때문이다. 한쪽 다리가 때로 아프다고 그 다리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몸이 살아가다 보면 아플 때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 살아가다 보면 서로를 마음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우리 가족 자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팔불출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모두 아름다운 팔불출이 된다면 사랑이 넘쳐 모든 가족이 행복할 텐데… 세상에 많고 많은 인연이 스쳐가지만 결국 가족이 제일이라. 그걸 잊지 말고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억겁의 세월을 건너온 나의 인연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늘나라에?  이 세상에?어디든 잘 있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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