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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Aug 04. 2020

벤야민의 글자상자와 책읽기

비평의  원천에  놓인...

벤야민은 글을 처음 배우던 순간을 회상한다. 회상의 한 가운데에 글자상자가 있다. 낱개의 독일어 글자들은 책에 인쇄된 글자들보다 "더 어리고 더 수줍은 소녀"처럼 보였다고 벤야민은 회상한다. s, c, h, l, a, f, e, n 등 낱개로 있는 글자들이 자매가 되어 한군데 모이면 'schlafen'(=잠자다)이라는 단어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은총의 상태였다. 순종적 태도로 은총을 붙잡으려 했지만 내 오른 손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내 오른 손은 마치 선택된 자들만 들여보내는 문지기처럼 밖에 앉아 기다려야만 했다." 이 대목에서 문지기가 들여보내지 않아 평생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보내던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생각난다. 문지기가 들여보내주 않아 하염 없이 기다리기만 하다 죽음을 맞이한 시골농부와 달리 어린 벤야민은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글자들은 낱개의 조각에 검은 색으로 칠한 물체가 더 이상 아니다. 마치 연금술에서 납이 갑자기 금이 되는 것과도 같다. 연금술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소설『푸른 꽃』의 저자)가 영혼이 담긴 시인의 글쓰기를 혼이 없는 기계적 글쓰기와 구분하면서 쓴 비유다. 연금술에서처럼 글자의 세계로의 문턱을 넘게 되면 글자들은 갑자기 정신적인 것으로 변용된다. 그런데 정작 그 문턱을 넘는 순간에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상상으로 그려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을 실제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글자와의 만남은 내게 큰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나의 유년시절은 글자들을 단어를 이루는 배열에 따라 글자판 가장자리로 밀어넣는 손 동작 안에 들어있다. 손은 그 때의 손동작을 몽상에서 재현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실제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제 걸을 수 있을 뿐 더이상 걷기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 "


글쓰기가 익숙해지면 습관이 되고 습관으로 자리잡기까지의 시간들은 망각된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못한다'는 속담처럼.(물론 이 속담은 다른 맥락에서 쓰이지만) 그 시간에 대한 회상은 지난 삶의 창고 한 구석에 방치되어있던 글자상자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글자상자는 잊고 있던 동경을 떠올려준다. 우리는 글자를 배우게 된 최초의 스토리 뿐 아니라 글자의 세계를 향하던 간절한 동경도 잊고 있다. 글쓰기의 원천에 놓인 그 동경을 기억해내는 것은 글을 쓰는 모든 이에게 중요하다.    

  그 다음 망각의 창고에서 끄집어낸 것은 초등학교 때 학급문고에서 빌린 책들이다. 주로 먼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 책이었다. 책 속의 글자들은 펑펑 눈이 내릴 때 창가에서 지켜보던 눈보라와 유사하다. 눈송이가 쉴 새 없이 내리듯, 책 속의 글자들 역시 쉴새 없이 교체되기 때문이다. 눈보라를 보며 어떤 이야기를 기대한 아이는 실망했지만, 글자들의 눈보라는 그렇지 않았다. 글자들은 먼 곳, 먼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먼 곳은 더 이상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바빌론, 바그다드, 알레스카, 트란스발은 이미 내 마음 속에 들어가 있었다." 글자들은 마음 속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다. 아날로그 이미지 뿐 아니라 디지털 이미지도 차고 넘치는 지금 글자들의 독점권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어린 시절 기껏해야 파노라마관에만 가본 벤야민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먼 나라에 대한 상상 여행은 책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쿠퍼의 소설 『모히칸족의 최후』 읽기 시작하자마자 벌써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최후의 모히칸 족의 천막으로 날아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책 읽는 어른도 아이처럼 먼 곳, 먼 과거로 여행할 수 있다. 어쩌면 경험이 많아서 아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아이의 책 읽기가 어른의 책 읽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책을 읽는 아이에게는 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가 해체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 한 밤중에 하얀 나이트가운을 입고 촛대를 들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몽유병 여자 이야기는 숨막히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상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벽여성을 뜻하는 Kleptomanin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앞 두 음절 'Klepto'('클토'라고 발음)도 어딘지 잔혹하고 위협적으로 들리는데 뒤의 두 음절 anin('아닌'이라고 발음)은 조상 할머니를 뜻하는 Ahnin과 유사한 발음으로 무시무시하게 들린다. "나는 '아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놀라움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두 세계의 경계가 해체되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감이라고 하니 나도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 있다. 무슨 만화인지 이름은 잊었는데, 만화 속에 어떤 소년이 포도를 먹고 머리에서 포도나무가 자라나는 그런 장면이 나왔다. 그 후 진짜로 포도를  먹지 못했다. 포도나무가 될까봐.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아이의 책읽기는 허구를 현실과 가르는 경계를 쉽게 해체시켜버리고 허구를 현실로 전환시킨다. 그래서 책의 장면을 현실의 장면과 융합시키기도 한다.

  벤야민이 글쓰기의 원천에 드리워져 있던 어릴적의 동경을 이해하고, 아이의 책 읽기 경험을 떠올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글쓰기와 읽기의 원천적 경험에서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의 책 읽기를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다. 아이는 책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자주 해체하거나 책의 의미와 무관한 상상에 종종 빠지기 때문이다. 비평가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글 어떤 것을 전달하는 통로나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 경험의  매체라는 점이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매체라는 테제. 이 테제는 벤야민의 비평을 죽 이끌어온  핵심적인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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