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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Aug 03. 2020

아들 벤야민과 부자 갈등,
카프카다운?


 아주 어릴 적 벤야민이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과 찍은 가족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아버지는 구렛나룻을 기르고 벤야민과 비슷하게 선이 가는 윤곽의 얼굴로 다소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고, 미소를 띠는 듯한 어머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은 많다. 자주 병치레를 해서 침대에 누워있곤 했던 아들의 머리맡에서 어머니는 아픈 아들을 치유하는 이야기꾼이었다. "이야기로 가득한 강한 물결이 내 몸을 통과해 흐르면서 부유물을 씻어내듯 병의 증상들을 씻어 내렸다. 통증은 이야기의 진행을 막고 있는 댐이었지만, 나중에 이야기의 힘이 커지면 통증의 바닥이 파이면서 통증은 다 망각의 심연으로 씻겨 내려갔다.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은 그러한 흐름의 강 바닥을 만들어주었다....어머니의 입가 가득히 흘러넘치는 이야기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97) 집에서 사교 모임이 있는 날 훌륭한 옷차림으로 잘자라는 인사를 하러 들어오신 어머니에 대한 회상도 행복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어머니가 남긴 향기, 어머니의 머릿수건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혹은 장신구의 노란 보석을 가까이 보면서 내가 누렸던 짧은 시간, 그것은 어머니가 다음 날 아침에 주겠다고 약속하신 크래커 캔디보다 더 나를 행복하게 했다."(89)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벤야민의 아버지도 어머니와 대조적이다. 회상 속 아버지는 업무상 전화 통화에서 위협투의 발언을 하거나 호통을 치는 이성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가 몇분이고 거의 몰아지경에 이를 때까지 정신 없이 전화기 손잡이를 돌릴 때 그의 손은 마치 법열에 사로잡힌 탁발승 같았다. 그러면 나는 심장이 뛰었다."(51) 청년 시절이 되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을리는 없다. 모든 아버지의 기대처럼 유능한 사회인이 되기는 커녕 변변한 직장 없이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에 의존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교수자격취득논문을 다 쓸때까지만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대학 교수만 되면 경제적 자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논문 통과가 안되면서 벤야민의 자립은 불가능해졌다. 벤야민은 결혼 후에도 가족과 함께 부모님의 고급 저택에 얹혀 살았다. 거의 40세가 될때까지. 그러니 부자 갈등은 불보듯 뻔하다. 부모님에 대한 회상은 더 자세하지는 않다. 아버지와의 언쟁이 자주 벌어졌다는 기록 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적은 없다. 아들 벤야민이 아버지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하는 간접적인 기록은 있다. 쥘리엥 그린이라는 프랑스 소설가에 대한 에세이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부모가 원시적이자 역사적인 이중적 형상으로 나타나는 악몽이야말로 이 작가가 평생 동안 다룬 모티프였다." 또 "가까운 과거의 어둠과 태고의 어둠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휩싸인 아버지들의 집"(독일어전집 2권, 333)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아버지들의 현재 모습 뒤에서 태고 이래 동일한 원초적 형상을 읽어내는 이런 시각은 카프카를 떠올리게 한다. 카프카는 많은 작품에서 부자갈등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변신』도 있지만 『선고』에서 이 주제는 전면에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노쇠한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드리는 아들, 그 순간 이불을 박차고 침대 위에 우뚝 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익사 선고를 내린다.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법한 부자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권력투쟁이라는 먼 옛날의 사건으로 소급되어 해석된다. "아버지는 해묵은 부자관계를 생생하고 중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주적 시대를 움직인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그는 아들에게 익사라는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부친은 형벌을 내리는 자다."(『카프카와 현대』, 59) 이렇게 묘사된 아버지는 아들의 반란을 제압한 권력자이다. 이 소설의 아버지는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글 속의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활기가 넘치지만 화를 잘 내고 독선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카프카는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자신의 기질과는 전혀 다른 아버지에게 굴욕감, 불만, 불안을 느꼈다. 어린 시절 추운 어느 날 밤에 물이 마시고 싶다고 우는 그를 혼내며 속옷 차림으로 베란다에 세워둔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실제로 보내지는 못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양가적인 심리가 드러난다. 이 아버지는 단편 『선고』의 거인과도 같은 아버지의 모델이다.      

벤야민은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카프카처럼 직접 묘사한 적은 없다.(물론 위의 카프카 편지도 소설적 허구로 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 대신 작가 비평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앞서 말한 프랑스 소설가 그린이나 카프카에 대한 비평에서 다룬 모티프를 통해서. 비평가 벤야민은 아버지로 인한 심적 고통을 카프카처럼 되새기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쥘리엥 그린에 대한 비평, 카프카에 대한 비평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에는 벤야민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벤야민의 아버지는 카프카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아들의 눈에 권력자의 원초적 형상으로 비쳐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심리적으로 느끼는 원초적 감정과는 달리 아들은 자신의 삶 자체를 통해 아버지를 넘어선다. 아버지가 원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삶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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