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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Aug 02. 2020

벤야민의 사랑과 〈지나가는 여인〉

 

벤야민은 「지나가는 여인에게」라는 보들레르의 시를 비평한 적이 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파리의 거리를 상복을 입은 한 여인이 시인을 스쳐 지나가고,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 시인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나는 마셨다. 넋 나간 사람처럼 몸을 떨며, /태풍을 품은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 속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한줄기 번갯불.....그리고 어둠! ㅡ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 없는 미인이여." 파리의 거리, 붐비는 인파 속에서 떠오르는 한 여인, 만남과 헤어짐의 극도로 짧은 순간, 이러한 조건들은 대도시적이다. 시인이 느끼는 감정은 순간적인 황홀감이다. 이 감정은 "처음 보는 순간보다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에 느끼는 사랑"이고 "에로스에 사로잡힌 사람의 황홀감이 아니라 성적 충격에 더 가깝다." '한줄기 번갯불'처럼 홀연 떠오르다 사라지는 이러한 감정은 고전적인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소망을 지속적으로 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포착하기 위해 감정과 지각을 순간적으로 고양시키는 집중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유형의 사랑이 현대 대도시인들의 경험에 일어난 변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벤야민은 보았다. 물론 구조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다 그렇게 변한 것은 아니다. 벤야민이 경험한 사랑을 봐도 그렇다.      

벤야민은 결혼 전에 좋아하던 조각가 율라 콘을 다시 보고 사랑을 느끼면서 문학적인 해결을 택했다. 즉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보다 문학 속 인물로 양식화한다. 괴테 소설 『친화력』 에 나오는 오틸리에에 대한 벤야민의 묘사에는 율라 콘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에로스에 대한 정열을 텍스트 속에서 변형시킨 것이다. 1924년 카프리 섬에서 만난 리가 출신의 아샤 라치스에 대한 사랑은 좀 달랐다. 벤야민은 이 여인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리가에서 온 러시아 혁명가 여인으로 지금까지 사귄 여성들 중에서 가장 특출한 여인"이라고. 이 여인은 벤야민에게 개인적인 사랑을 넘어 지적 자극을 준다. 벤야민은 아샤 라치스와의 결합을 꿈꾸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일방통행로』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은 라치스에 대한 마음을 묘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 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환해졌다. 마치 그 사람의 창문에 탐조등이 세워져 그 지역을 빛다발로 분해해놓은 것 같았다."(105)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80)     

벤야민은 세상을 변용시키는 사랑의 힘을 묘사하고, 또 사랑의 터전은 상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이 들어버린 결점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은 물론 보들레르가 「지나가는 여인에게」에서 묘사한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는 다르다. 오랜 소망이 되는 사랑, 지속되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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