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애 Feb 05. 2022

어머니의 목소리

프루스트와 벤야민의 어머니

프루스트는 벤야민의 유년시절 회상에서 중요한 길라잡이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니 사소한 유사점들이 눈에 띈다. 잠자리에 저녁 인사를 하러 들어올 어머니에 대한 갈망도 한가지이다. 그런데 프루스트의 자전 소설에 나오는 화자는 분리불안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녁 키스를 해주러 올라오는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 행복에 대한 예감보다는 아주 짧은 만남 뒤에 이어질 작별의 순간을 미리 떠올리며 고통을 느낀다. 반면에 유년의 벤야민은 어머니가 작별 인사를 하러 들어와서 남긴 여운으로 행복해하고 위로를 받는다. 집안에서 열리는 저녁 만찬을 위해 치장한 어머니의 장신구에서는 "수천 가지 작은 불꽃에서 무도곡이 들리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로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그날 남은 시간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해준다. 프루스트의 어린 화자도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회상한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감수성이라는 음역에 맞는 문장들에 적합한 온갖 자연스러운 다정함이나 넘쳐흐르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려고 하셨다. 어머니는... 단어 자체에는 표시되지 않은 따뜻한 억양을 찾아내셨다. 그 억양 덕분에 어머니는 책을 읽으면서, 동사 시제에서 느껴지는 생경함을 완화했고, 반과거와 단순 과거에는 선한 마음이 깃든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깃든 우수를 부여하셨다."


벤야민은 프루스트처럼 어머니의 목소리의 특별함을 묘사하기보다는 이야기와 손길의 화합과 거기서 비롯되는 치유의 힘을  이야기한다.


"내 몸은 이야기를 탐하고 있었다. 이야기로 가득 찬 강한 물길은 내 몸을 통과해 흐르면서 몸 안의 병의 징후들을 부유물처럼 씻어 내렸다. 통증은 이야기의 진행을 막고 있는 댐이었지만 나중에 이야기의 힘이 커지면서 통증의 바닥이 파이면서 망각의 심연으로 씻겨 내려갔다.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은 그러한 흐름의 하상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것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어느덧 어머니의 입가 가득히 흘러넘치는 이야기들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거쳐 졸졸 흘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많은 노래들도 들려주셨다. 따라 부르지는 않았지만 노래 듣기를 좋아했다고 벤야민은 회상한다. 벤야민에게 어머니 노래의 멜로디가 회상의 울림 공간에서 울려 퍼진다. 가사보다 멜로디에 집중할 때 더 노래하는 사람의 음색, 억양, 세기 등 개별 특징이 잘 들어온다.  가사의 내용은 누가 부르든 동일하나 멜로디는 노래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실현되기 때문이다.  또 청각적 인상은 시각적 인상보다  더 대상을 가깝게 느끼게 하고 더 기억에 남는다. (물론 말의 내용은 잊을지 몰라도 듣기 좋은 목소리 거슬리는 목소리 흥분한 목소리 화난 목소리 등은 어떤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떠올릴 때보다 더 생생하다.ㅡ여기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겠지만)


벤야민의 회상은 180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읽기 교육 혁명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주목한 매체학자 키틀러의 이론을 연상시킨다. 『기록 시스템 1800 · 1900』이라는 책에서 키틀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영혼 추구, 자기 관찰, 내면성을 중시하던 독일의 낭만주의 고전주의 문학의 원천을 읽기와 쓰기 등 문화적 기술에 일어난 혁신에서 찾는다. 당시의 교육학자, 교육 관료들에 의해 퍼진 새로운 읽기와 쓰기 교육은 "어머니의 입"을 강조한다.  19세기 초 독일 바이에른의 장학사였던 슈테파니가 1807년에 쓴 책에 따르면,  아이는 의미 없는 철자들을 기계적으로 쓰고 읽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지닌 음절을 어머니의 입으로 들으면서 글자를 배운다. 그러면 글자는 낯선 기호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의미의 세계로 이행하는 채널이 된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영혼의 소리로 들린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문학 고유의 믿음, 즉  범신론적인 자연에 대한 믿음, 이상적인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믿음은, 이처럼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영혼의 소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틀러가 낭만주의 문학의 기술적 토대를 파헤치면서 발견한 이러한 교육법은 당시 여성, 어머니의 이상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이상적 여성, 어머니는 자연의 내적 목소리, 순수한 내면적 정신으로 이상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로닉 하게도 정작 여성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인정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여성은 국가공무원이 될 수 없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었으며, 저자로서의 명성을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음성이 아무리 효과적인 알파벳 교수법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강조되었을지는 몰라도, 모든 어머니는 "스스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담화의 원천"이라고 이상화해도 말 없는 존재에 머문다. 따라서 어머니의 목소리에 대한 이상화가 깨지고 나면, 어머니에 대해 할 말은 거의 없어진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해주면 짧은 순간 이나마 자신의 병이 치료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어머니의 이야기에는 주술적인 힘이 부여된다. 어머니가 아픈 아이의 배를  그냥 쓰다듬기만 하지 않고 "엄마 손은 약손이다~ 엄마 손은 약손이다 ~"라고 반복해서 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치유의 힘을 지니고, 위안을 주는 힘을 주는 울림으로만 상기될 뿐이고, 어머니에 대한 더 이상의 기억은 찾기 힘들다. 프루스트를 봐도 그렇고, 벤야민을 봐도 그렇다. 낭만주의 시대가 지난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어머니는 프루스트에게도 벤야민에게도 이상화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사교: 프루스트와 벤야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