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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Dec 29. 2020

사교: 프루스트와 벤야민

요즘은 모든 만남의 다리가 점선으로 바뀌어 있어서인지 부쩍 만남, '함께 어울림'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사교라는 테마가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 완독을 시도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사교계가 주무대이다. 벤야민은「프루스트의 이미지」에서 기억, 시간, 행복, 영원 등 프루스트를 이해할 주요 테마들을 다루는 한편, 사교계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판에도 주목한다. 프루스트 소설은 워낙  대하소설이라 완독 할 엄두가 나지 않는데  최근에 겨우 절반 정도 읽으면서 벤야민이 왜 "호기심에 가득 찬 자의 흉내내기'라고 했는지 약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비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자신도 속물이고 놀기 좋아하는 사교계의 인사였던 프루스트가 '벨 에포크'라는 한물 간 시대의 가장 놀라운 비밀들을 슬쩍 스치면서 잡아채듯" 폭로한 작품이다. 프루스트를 왜 속물로 지칭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돈 벌 필요가 없는 부자였던 프루스트가 사교계를 평생 들락거렸다고 하니 그럴만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교계에 완전히 동화된 것처럼 보인 인물이 사실은 보호색으로 자신을 숨긴 탐정이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그런 자가 잔뜩 호기심을 갖고 프랑스 상류층(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로 이루어진)의 세계를 세세하게 관찰하면서 남긴 업적은 파괴적이다.


"프루스트는 이 세계를 웃음 속에서 내팽개친다. 이러한 웃음 속에서 세계는 산산조각이 난다. 즉 가족과 인격의 통일성, 성도덕, 신분적 명예의 통일성이 산산조각이 난다. 부르주아의 점잖음이  웃음 속에서 박살이 나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으로 도주하고 귀족에 다시 동화되는 모습이 바로 이 작품의 사회학적 주제이다."(「프루스트의 이미지」)    


 예술, 학문, 사상에 대한 그럴듯한 담화에도 불구하고, 아는 체하고, 교양 있는 인격체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산산조각이 난 자리에 속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인기가 있는 작가, 화가, 연극배우 등을 둘러싼 대화도 소설에 자주 나오는데도 속물주의 비판이라는 테제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점잖은 체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속물로 드러나는지는 꼼꼼한 인물분석을 통해 설명될 수 있겠지만 예술, 학문, 사상 그자체가 관심이라기보다는 대화를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벨 에포크 시대에 이미 기술사회와 대중 사회로의 전환이 예고되면서 사교계를 둘러싼 문화적 환경이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이로써  사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한물간 영역이 되었고, 사교계 인사들 역시  소비자들의 비밀결사처럼 보이게 되었다.


사교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벤야민의  유년시절 회상에도 나온다. 다만 어조는 프루스트 비평에서와는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상의 조명이 비추어지는 사교의 이중적 이미이다. 이미지들에는 사교에 대한 다각도의 성찰이 압축되어있다. 먼저 사교의 부정적 이미지는 단편 〈사교모임〉에서 괴물로 나타난다.


"모임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치 벌써 해산하는 것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다. 사실은 좀 더 떨어진 방으로 장소를 옮겼던 것이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자 해안가의 축축한 진흙에서 도피처를 찾아 사라지는 괴물처럼 말이다. 나는 방들을 가득 채운 분위기가 무언가 미묘하고 잔잔하면서도 사람들을 휩싸면서 그들의 숨통을 조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예감했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벤야민의 유년시절이 속한 20세기 초에 대도시 베를린의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 역시 귀족을 모방한 사교 문화를 향유했다. 그러나 참가할 수 없고 웅성거리는 소리로만 경험한 사교 모임은 아이에게 정체불명의 존재가 된다. 발걸음 소리로만 접하는 사교 모임이 해안가에 사는 괴물로 연상되고 아버지가 입은  연미복은 전사의 갑옷으로 떠올리는 아이. 사교는 부르주아 계급의 화려한 삶을 가장 잘 상징하는 문화에 속하지만,  화려할수록 그것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다가올 파국을 깊숙이 은폐하는 환등상이 된다.  


회상에서는 괴물, 전사의 이미지로만 사교 모임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사교 모임을 위한 준비를 돕는 아이에게 사교는 전쟁 같은 일상을 끝낼 평화의 축제로 기대된다. 아이는 식탁에 식기류를 배열하고, 이름표를 놓으면서 화려한 연회석에 대한 기대와 행복에 대한 예감에 젖는다. 그러면서 "식탁에 차려진 모든 그릇들에서 전해오는 작은 평화의 신호"가 마음속 깊숙이 파고든다. 특히 순백의 도자기로 된 식탁 세트에 작게 새겨진 수레바퀴 문양이 주는 감미로운 평화의 신호는 일상의 식탁에서 벌어지곤 하던 부모님과의 언쟁을 다 잊게 해 줄 만한 치유력을 지닌다. 화려한 연회석에 대한 매혹은 저녁 인사를 해주러 아이의 방에 들어온 어머니의 커다란 장신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장신구의 가운데에는 노란빛으로 반짝거리는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고, 주위에는 적당한 크기로 여러 가지 색깔의― 녹색 , 파란색, 노란색, 장미색, 보라색 ― 보석들이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쳐다볼 때마다 자주 이 장신구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장신구의 가장자리에서 내뿜는 수천의 작은 불꽃에서 무도곡이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수레국화 문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다채로운 보석 장신구는 사교의 긍정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 이미지로 회상된다. 원래 사교는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특별한 사회화의 한 형식이다. 짐멜의 말을 빌자면, 이상적인 사교는 일종의 사회적 유희로서 어떠한 외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목적성을 가지는 사회적 형식, 자율적 예술작품의 자족성과 비교될 정도로 순수한 사회적 형식이다. 물론 사교의 역사는 이러한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사교는 일정한 양식화된 유희를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부, 사회적 지위, 학식, 명성, 능력, 개인의 삶 등에 대한 개인 정보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의 성격, 기분, 감정  등 내밀한 주관적인 요소가 대화와 소통에 개입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가  비인격화될수록 사람들은 인격적 만남에 대한 욕구를 사교를 통해 충족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교의 인격적 관계에서 주관적-인격적인 것을 자연적 상태 그대로 표출해서는 안된다. 개인적, 주관적 요소는 우발적으로 작용하면서 사교를 깨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가 추종하던 사교 문화를 바라보는 벤야민의 시각에는 외부 현실로부터 초연한 특권화 된 시공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순수한 사회화 형식으로서 사교의 요소들 모두 부정는 것은 아니다. 연회석의 찬란함(특별한 날을 위한 식기들), 행복감의 고조(어머니의 장신구에서 들려오는 무도곡), 함께 어울림에 대한 기대감(물론 아이는 실망으로 그치지만) 등이 그렇다.  사교 문화가 한물 간 문화로 보여도 몰락하는 것이 모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새로운 맥락에서 구제할만한 긍정적인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사의 변증법을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배제된 부정적인 부분에서 다시금 새로운 구분법을 적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관점의 전환을 통해 부정적인 부분 안에서도 새롭게 긍정적인 요소, 이전에 규정된 것과는 다른 요소가 드러나도록 말이다."(『파사주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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