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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쳐라이즈 Jul 02. 2020

엄마, 우리 아들 올해는 시험붙도록 도와줘

- 미련을 갖고 도전하는 수험생 이야기

내 나이 20살, 다른 친구들은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쯤, 나는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원한 대학교에 원서를 넣지 못해 시작한 재수 생활이었기에 마음이 편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대학생보다 더 즐거운 생활을 보냈다. 그냥 시간만 보내면서 성적을 유지하면 원하는 대학을 무난히 갈 수 있다는 자신감. 그렇게 난 자신감 넘치는 재수생 생활을 노량진에서 시작했다.


시골 촌놈이었던 내가 재수생 생활을 노량진에서 하기 위해 머문 곳은 고시촌 근처 특유의 숙박 형태인 ‘잠만 자는 방’이었다. 방에 가벽을 세워 여러 명이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화장실과 작은 거실을 공유하는 형태의 숙소는 비좁았다. 사생활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덤! 덕분에 바로 옆방에서 머무는 형(?)에 대해 금방 알 수 있었다.


형은 그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로 경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시골 출신으로 공무원 시험의 메카라 불리는 노량진에서 생활한 지 5년이 넘었다고 했다. 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도 있었지만 여자 쪽 집안에서 경찰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형은 시험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지곤 했다.


문제는 형이 공부보다 술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밤이면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며 세상을 욕했다. 좁디좁은 방에 앉아 TV를 보면서 술을 마시는 형은 화가 날 때면 벽을 두드리곤 했다.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쳐 나까지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었고, 가벽은 오히려 하나의 악기가 된 듯 통통 소리를 내며 나는 성가시게 했다. 시험에 연거푸 떨어져 자신의 미래가 걱정될 법도 하건만, 공부에 몰입해도 아까운 시간에 술을 마시며 낭비하는 형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시간은 흘러 나는 계획했던 대학에 입학했고, 형은 또 떨어졌다. 헤어지는 날, 계속 노량진에 있을 거냐는 내 질문에 형은 될 때까지 노력해 볼 것이라 대답했다. 노력, 솔직히 형이 노력할 것이라 믿지 않았지만 할 수 있을 거란 위로의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노량진이란 곳이 그랬다. 이번 합격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 하지만 그들 중 원하는 바를 이루고 떠나는 이는 소수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3년이 지났다. 이제 4학년이 된 나는 그해 여름 노량진을 다시 찾았다. 남들은 잠들어있을 새벽녘, 지하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향하는 전철 속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땐가 신문 속에서 보았던 노량진 하루 유동인구 10만 명이란 숫자는 정말 일지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몸으로 깨달으며 방학기간을 노량진 학원가에서 보냈다.


매일 아침 전철에서 내려 학원으로 향하는 육교에는 새벽부터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필기구를 파는 사람, 야채를 파는 노인, 지나가는 수험생들에게 쉴틈 없이 나눠주는 유인물들은 안 그래도 좁은 거리를 더욱 비좁게 만들고 있었다.


그뿐인가? 시간에 쫓겨 길거리에서 식사를 처리하는 수험생들을 유혹하는 길거리 노점상에서는 다양한 음식의 냄새가 이른 새벽부터 풍기기 시작했고, 이는 곧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와 뒤섞여 노량진 특유의 냄새를 만들고 있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노량진에 다시 오게 된 나는 공부를 대충 했다. 마치 재수생활 만났던 그 형처럼.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했고, 노량진에 학원 수만큼 많이 있는 PC방과 노래방을 드나들며 놀았다. 막연하게 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오만하게 굴었던 1년은 결국 나를 배신했다. 나에게 남은 건 재수생 신분이었다.


나의 임용시험 재수생활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작년에 공부했던 교육과정은 새롭게 바뀌었고,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은 새로운 교육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교육대학교 졸업생은 일반 기업에서 좋게 여기지 않는다 말했다. 그 말은 대안이 없다는 거였다. 난 직업선택이란 갈림길에서 이미 막다른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온 상태였다. 이제는 돌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 나는 이 길의 끝을 봐야 했다. 그 끝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게 문제라면 큰 문제였다.


난 임용 재수생활을 수능 재수생활처럼 했다. 1년을 더 하는데, 내가 못할 것은 없어 보였다. 시간은 많은 것 같았고, 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막연히 그랬다. 그리고 그런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시험을 준비하는 내 모습은 점점 수능 재수 시절 만났던 형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험을 준비하는 나,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 열정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모습까지! 그건 과거의 내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형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난 점점 초조해졌다. 하루하루 시험 날이 다가올수록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현역 시절과 재수 초기 시절 초조하지 않았던 이유는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거였다. 모르니 보이지 않았다. 내 수준이 지금 어느 위치에 와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공부하면 할수록 올해도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조금씩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은 잡혔지만 이젠 시간이 없었다. 너무 뒤늦은 깨달음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문제는 교과서가 다시 바뀌는 내년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내 자신감을 점차 갉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휩싸일수록 공부는 점점 더 하기 어려워졌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내 인생도 수험생 생활을 반복할 것이란 두려움이 나를 덮쳤고, 그때부터 나는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험을 두어 달쯤 앞둔 그해 추석날, 반쯤 나간 정신을 부여잡고 고향집에 내려갔다. 이미 올해도 틀렸다는 부담감에서 잠시 벗어나 부모님 품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 내 마음을 잘 알았던 것인지 부모님은 나에게 시험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그저 먹고 싶다는 음식만 해 주었다. 게다가 수험생 아들을 챙겨준다며 외할머니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난 중요한 수험생이니까.


그리고 한 달 뒤, 외할머니는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너무나 정정하셨던 외할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내려가는 고속버스 속에서 나는 엄마가 생각났다. 추석날, 외할머니께는 다음에 내려가면 된다며 쉬는 내내 나의 수발을 들어주었던 엄마. 엄마의 그 모습이 나를 아프게 했다.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마지막 날. 관 속에 들어가는 마지막으로 보는 그 순간, 엄마는 오열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사랑했다는 말과 함께 ‘우리 아들 올해는 시험 붙도록 도와줘~.’라는 부탁을 울면서 했다. 엄마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말은 안 했지만 난 이미 그해 시험을 포기하고 있었다. 막연히 삼수를 하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때 난 완벽히 수능 재수 시절 만났던 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해 시험도 역시 떨어졌다. 하지만 그날 엄마의 울부짖음은 나의 정신 상태를 바꿔놓았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 끝날 때 닫고 나왔다. 일관된 습관을 만들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아침은 도서관 앞 편의점에서 산 삼각 김밥을 먹었다. 점심은 알밥, 저녁은 회덮밥만 먹으며 일 년을 보냈다. 마치 사람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을 먹었던 곰처럼, 난 교사가 되기 위해 알밥과 회덮밥만 먹었다. 물론 내가 알밥과 회덮밥을 좋아해서 먹은 것은 아니다. 그저 알밥과 회덮밥이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가장 빠르게 준비되는 음식이었기에 먹었다. 핸드폰은 집에 두고 나 자신을 철저하게 고립한 그해, 난 임용시험에 고득점으로 합격해 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교사로서의 삶을 산지도 어느덧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그때의 일을 웃으며 학생들 앞에서 이야기한다. 나를 반면교사로 삼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말이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난 안다. 아직 내 이야기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일명 공시생이 30만 명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마어마한 수치가 말해주듯 그들은 쉽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쉽게 포기하지도 않을 것 같다. 나를 비롯한 수험생들이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온 길에 미련을 갖고 계속 도전할 것이다.


언제 이룰지 모르는 그 막연한 인내의 시간을 그들은 참고 지내야 한다. 물론 그 길 끝에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목표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이 짧을 수도, 아니면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다. 이 또한 사실이다.


문뜩 재수 시절 만났던 그 형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까? 아니면 결국 포기했을까? 형이 어떤 길을 선택했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길 빌며 내 삶의 실패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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