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뭉게구름 Nov 12. 2018

다른 방식으로 보기 #2 낯설게 보기

 많은 사람들이 눈을 통해 고화질의 사진과 같은 선명한 이미지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신경이 뇌에 전달하는 정보는 대상의 일련의 윤곽과 실마리에 불과하다. UC버클리의 프랭크 워블린 교수가 2001년에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시신경은 10개에서 12개의 출력 채널을 가지며, 각 채널은 주어진 장면에 관한 소량의 정보만을 전달한다. 결국 12개의  흐릿한 영상 정보를 뇌에 저장된 기억에 의존하여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 글에서 설명했던 언어적 상징체계를 사용하는  L-모드(좌뇌식 사고)가 우선적으로 작동하여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이유이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것을 그려야 한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L-모드를 작동시켜 깊은 곳에 숨어있는 기억까지 끄집어내서 무엇인지 알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모르겠다면 포기하고 그제야  몰입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본 것을 잊어먹지 않기 위해 곧바로 종이에 옮긴다. R-모드(우뇌식 사고)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R-모드의 작동은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그림 솜씨도 깜작 놀랄 정도로 향상시켜 준다.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평소 익숙한 사물을 대상으로 삼는다. 자주 보는 대상을 그리면 쉬울 것 같은데, 오히려 L-모드의 작동으로 스케치조차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드로잉 하는 기법을 배우기 앞서 익숙한 사물을 평소와 다르게 낯설게 보는 훈련을 통해 R-모드를 작동시키는 법을 익혀야 한다.


(1) 거꾸로 그리기


낯익은 것도 거꾸로 되어있으면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평소에 늘 보던 모습이 아니어서 우리의 기억과 개념은 혼란하게 되고, 특히 그림으로 그리고자 할 때는 시각적인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이것은 무슨 그림일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보이는 데로 그려보자.  "이 선은 이 쪽으로 굽었네", "이 선은 종이 외곽선과 30도 정도 각을 이루는 것 같아" 와 같이 단지 선만을 관찰한 대로 따라서 그리면  된다. 아래의 그림은 내가 수업 시간에 이러한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그 밑에 있는 2주 전 수업 첫 시간에 그린 그림과 비교해보면 거꾸로 그리기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그리기 <2014.7.26.>


워크숍 첫 수업 그림 <2014.7.12.>


우리는 사물을 그리거나 볼 때 위아래와 옆을 규정해 버리고 평소의 모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지 어둡고 밝은 면과 형태만 볼 수 있을 뿐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을 때 두뇌는 혼돈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뇌는  L-모드를 할 수 없고 R-모드를  작동시키게 된다. R-모드가 작동되면 몰입해서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고 단지 이것을 종이에 옮기면  되는 것이다.


(2) 순수윤곽소묘


이제부터 손을 그릴 거예요,
왼손에 있는 주름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그리세요.
그런데 절대로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면 안 돼요.


'이건 또 뭔 소린가? 어떻게 잘 되고 있는지 보지도 않으면서 그릴 수가 있지. 제대로 그릴 수 있나?'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집중하여  손에 있는 잔주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40년 넘게 살면서 내 손에 있는 주름을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순수윤곽소묘 <2014.8.2.>


위의 그림은 왼손, 꾸긴 종이, 깃털을 안 보고 그린 것이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만큼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형태는 몇 번 방향을 잘 못 잡아 어색하게 됐지만 디테일은 훨씬 좋아졌다. 이와 같이 그리는 방법은   '순수 윤곽소묘(Pure Contour Drawing)'라고 한다. 키몬 니콜레이즈(Kimon Nicolaides)가  1941년 쓴 ≪그림을 자연스럽게 그리는 법≫에 소개된 이 방법은 미국의 미술 교사들 사이에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그림을 안 보고 그릴까? '순수 윤곽소묘'는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훈련이다.  한번 자신의 손금을 들여다보고 옆의 종이에 그대로 그려봐라.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에는 손금의  형태보다는 '생명선이 조금 짧네', '재물선이 쭉 올라갔네'와 같이 언어적 상징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순수 윤곽소묘'는 L-모드를 끄고 R-모드를 작동시켜 집중해서 대상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더해서 본 데로 기록하는 훈련을 시켜주는 것이다.




화병, Acrylic on canvas, 2016.2.13.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문득 번지기가 해보고 싶었다. 무작정 캔버스 위에 파란색과 하얀색 물감을 떨어뜨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커다란 원이 만들어질 때까지 떨어뜨렸다. 두 색은 서로 섞이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흰색은 아래로 가라앉고 위에는 파란색 물감만이 보였다. 그다음 주 화실에 가보니 파란 원 위에 하얀 눈꽃이 멋있게 피어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꽃도 그리려고 했으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 붓으로 찍어 완성했다. 사실 번지기는 종이와 같이 물을 잘 흡수하는 재료 위해 사용해야 하는 기법이다. 내가 사용한 면 캔버스는 물을 잘 흡수하지 않아 번지기 기법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 물과 물감의 비율을 잘 조절하면 캔버스 위에서도 번지기 기법이 가능하다. 물론 종이에 하는 것과는 효과와 느낌이 다르다.


배경색을 칠하고 마무리를 고심하다 꽃가지를 그리는 대신 화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려 안개꽃을 표현했다. 마지막에 화병 밑에 하얀색 물감을 뿌려 화병의 신비로운 느낌을 더했다. 원래 뿌리기 기법은 전용 스프레이를 사용해야 입자가 곱게 나온다. 하지만 화장품 용기에 물감을 담아 사용한 덕에 입자는 불균일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또 다른 매력을 준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거꾸로 또는 옆으로 돌려놓고 한참을 쳐다본다. 그러면 원래 그리려 했던 것과 다른 새로운 영감이 떠 오른다. 그 결과 그림의 처음 시작과 끝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위의 그림을 거꾸로 뒤집으면 무엇이 보일까? 그리고 그 옆에 또 한 그림을 나란히 걸어 놓으면...


    

Full Moon, Acrylic on Canvas, 2016

이전 그림과는 또 다른 스토리가 펼쳐진다. 꽃이 활짝 핀 언덕을 비추는 커다란 보름달과 별들...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숲 속을 걸어가다 만난 호수 위로 비추는 보름달과 눈 덮인 산...


An artwork should point in more than one direction
- Luc Tuymans -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방식으로 보기 #1 좌뇌 vs. 우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