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취미 활동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컬러링북 열풍이 불고 하정우, 솔비 등 연예인들의 작품 활동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때문인지 싶다. 그 덕분에 성인 미술 또는 취미미술을 지향하는 학원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이전에는 백화점 문화센터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배울 곳이 늘어난다니 반가운 일이다.
성인이 되어 미술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팍팍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힐링을 위해, 또는 어렸을 때의 꿈을 되찾기 위해, 단지 좋아하는 연예인이 미술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연을 갖고 미술 학원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일시적인 충동이 아닌 지속적으로 어쩌면 평생 그림을 그리게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작점 이상의 의미가 자신의 삶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
가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똥 손(밑에 있는 워크숍 첫 시간에 그린 3장의 그림을 보면 이해할 것이다)에 미술을 먼 나라 이야기쯤으로 생각했던 내가 왜 4년 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미술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새로운 희망' 때문에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 된 것 같다. 우리는 직장과 가정생활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많은 경우 상대방에게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할지 등을 설명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뭘 그릴지, 어떻게 그릴지, 누구의 허락도 설명도 필요 없다. 그저 내가 하고픈 데로 시작하고 끝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미술로 밥 벌어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에게 간섭받을 이유도 없고 단지 미술이 주는 자유를 만끽할 뿐이다.
내가 미술을 시작할 때는 40대 중반이었다. 회사와 집을 쳇바퀴처럼 돌던 단조로운 일상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쳐있을 때 미술은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 비록 1주일에 한 번이지만 은퇴할 때까지 남은 10여 년 동안 계속 그리면 나중에 내 이름으로 전시회도 하고 작품 활동도 할 수 있으리라. 이전에는 여행지에서 1시간 남짓 휙 돌아보면 다였던 미술관도 요즘엔 왜 이리 재밌는지. 언젠가는 MOMA에서 하루 종일 작품을 감상하고 1주일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미술관과 현대미술의 성지를 순례하리라. 건물 앞의 조각에 눈길을 보내고 파란 하늘 속 구름에서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면서 잠시나마 삶의 여유와 풍요로움을 느낀다.
성인이 되어 다시 미술을 시작한 사람과 미술 전공자는 미술을 대하는 태도와 의미가 다를 것이다. 또한 '자유'와 '새로운 희망'이란 단어가 내 삶 속에서 나온 것처럼, 각자마다 나이, 동기, 환경 등 따라 서로 다른 단어로 다가올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삶에서 미술의 의미는 선생님도 그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미술의 의미를 물어보고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미술의 의미를 찾는 작업과 함께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내 작은 아들은 7살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에서 1년간 함께 지내면서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게 하려고 미국인 대학생에게 테스트를 받았다. 그 대학생이 했던 말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음(音)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연주하네요. 기초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한국에 돌아온 후 방과 후 활동으로 했던 학교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봤을 때이다. 그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의 삽입곡인 베토벤 바이러스를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어려운 곡을 해냈다는 뿌듯함보다 정말 아이들이 그 곡을 얼마나 알고 느끼면서 연주하는지 의구심만 들었다.
이 문제는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물을 입체감 있게 그리거나 유화와 수채화 등의 재료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술은 기본적으로 창작(創作)의 과정이다. 특히 현실의 재현을 포기한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창작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테크닉을 배우기에 앞서, 미술의 창작 과정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세 번의 워크숍을 통해 미술을 배웠다. 첫 번째는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법을, 그다음은 색에 대하여, 마지막은 내면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배웠다는 단어보다 각각에 대해 맛을 보고 느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워크숍 동안 테크닉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고, 단지 각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그리는 과정에서 느꼈던 것을 서로 나누었을 뿐이다. 통상적인 미술학원과 다른 이 워크숍은 내게 미술의 창작 과정이 뭔지 알게 해주고,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걸어가게 하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워크숍을 통해 알게되고 느꼈던 것들은 앞으로 몇 회의 글을 통해 소개하겠다.)
3개의 워크숍을 마치고 남들과 마찬가지로 모네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흉내내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거장의 작품이나 풍경 사진을 보면서 따라 그린 것은 이 두 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무엇인가를 보고 그대로 그리는 것은 재미도 없고 내 그림 솜씨에 대한 자괴감만 들게 했다. 그냥 순간순간 느낌에 따라 손이 가는데로 그리기로 하고 두번째 작품이 위의 그림이다. 어린 아이가 원 그리기로 미술을 시작하듯이 커다란 종이에 오일 파스텔과 아크릴 물감으로 원과 주변을 먼저 칠한 후, 밤 하늘에 휘엉청 빛나는 달의 느낌을 살려 눈덮인 산과 호수를 그려 나갔다. 그림 솜씨는 엉성할지 모르지만 나만의 감성과 느낌이 충만한 그림에 희열을 느꼈던 첫번째 작품이다.